‘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L시인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무슨 일 있어요?’ 진료실의 의자에 앉은 나의 몸무게가 가라앉는 것을 느끼며 방 안에 꽉 찬 공기가 이제야 어딘가의 빈틈으로 새는 것 같았습니다. 숨이 막힌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이 너울처럼 휩쓸고 지나간 후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나는 천천히 아이폰에 문자 메시지를 두드렸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이 남들보다도 특별히 고달팠다는 생각을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게도 나름 어려운 고비들은 몇 차례 있었습니다. 내가 인턴 레지던트할 때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금전적으로 부담을 안고 살았습니다. 병원 개업을 하면서 궁핍한 처지로 인해 영세하게 출발하다 보니 실패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젊다는 시간의 여유와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의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이 있어서 그런대로 극복을 해온 셈이었습니다.
2017년이 들어서면서 내게는 천둥번개가 치는 폭우는 아니지만 무언가 암울한 구름이 끼는 시간이 나를 압박했습니다. 시간의 경과에 의한 자연스런 물화(物化) 현상이라고 장자는 말하겠지만 내 몸 여기저기서 삐걱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나로서는 적지 않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엎친데 덮친다고 아내가 정말 예기치도 못한 일로 K대학병원, S대학병원을 들락거리며 시달리다가 이제야 겨우 일단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높은 천장 아래에서 사람들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진찰실 앞에서 몸을 최대한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시장바닥처럼 와글거리는 속에서도 각자의 삶의 흐름이 강물처럼 서로 엇갈리며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옛날 내가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그 속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돌아다녔을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접수에 기웃거리고 의사의 처분만 기다리고 앉았는 내가 왠지 처량해 보였습니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 아내는 오히려 내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이 그림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고는 나는 외면해 버렸습니다. 누가 누가 위로해 준다는 건지. 수술실 밖에서 서성거리며 수술 환자의 명단이 올라오는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화면에서는 수술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수술실에서 회복실로 옮겼다는 정보가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오직 기다리고 처분만 바라보고 있는 건 외에 없다는 사실이 왠지 무기력한 자신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병실에서 아내의 침대 아래에 있는 보호자 침대에 몸의 뒷부분을 바닥에 다 붙였습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먼 바다에 표류하는 배와 같았습니다. 파도에 둥둥 떠 있기만 하지 내가 능동적으로 배를 저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아내의 신음 소리에 잠을 깨고 몸을 일으켜 주고 나서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병실의 복도를 걸었습니다. 새벽 두 시. 형광등의 회색 빛의 적막감을 헤짚고 나갔습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병실 복도를 몇 차례 돌면서 나의 머리는 논리적 사고를 진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정지되어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속에서 너울너울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특별한 사단이 나지 않고 조직 검사도 내가 희망한 그 이상의 나쁜 것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딱히 천재지변 같은 혹독한 시련은 아닐지라도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나의 다가오는 시간들의 결과가 마음에 걸리고 예상치도 못한 일들을 겪고 보니 나는 내가 믿어온 신앙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에 대해 실망하여 돌아서겠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이성적이고 차분한 생각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무언가 하나님은 선하다는 쪽으로 어떤 사태도 거기에 합목적적으로 대입하다 보니 사실은 무리하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어느 의미에서는 일부러라도 눈을 감고 신의 섭리라는 명제 아래 모든 사고를 끼어 맞춘 느낌이었습니다. 이제는 적어도 그런 우는 범치 말자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불합리한 것은 불합리하다고 일단은 걸어두고 나가는 생각입니다.
L시인으로부터 답신이 문자로 왔습니다. 지난 달에 정진규 시인이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분의 『본색』 시집의 시를 하나하나 외워서 베껴썼다고 L시인이 그분에게 전화하니 그렇게 좋아하더라는 말을 들은 것은 몇 달 전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내게는 의미 있는 시인이었습니다. 별로 시답지 않은 시를 쓴다고 지내온 세월 속에서 그래도 내가 관심을 가졌던 시인은 오규원, 송재학, 김종삼, 정진규, 그리고 최근의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정도였습니다. 그분의 산문시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산문시와는 달리 문장들의 비약이 많아서 어떤 시들은 이해하는 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그의 시 속에 가끔씩 보이는 고투(古套)의 한문들이었습니다. 왠지 그런 오래된 곰팡이 나는 냄새가 나를 편안하게 했습니다.
정진규 시인을 볼 때마다 그의 호(號)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경산(絅山)이라고 하는 그 ‘경‘자가 흔히 사용하는 자도 아니고 뭔가 심상치가 않아 보였습니다. 사전에 보면 ’끌어 죄다‘, ’엄하다(매우 철저하고 바르다)‘라고 되어 있다. 그분의 호만 보아도 그분의 인품과 그분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짚히고 상상이 갑니다.
그러나 L시인의 전언으로부터 내가 마음 속으로 충격을 먹은 것은 사실 딴 데 있었습니다. 그분의 생년을 보니 1939년이었습니다. 내가 1948년이니 그분은 거의 10년 가까이 더 산 셈입니다. 그러자 나의 머리 속을 후다닥 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의 삶도 이분과 같다면 내게 남은 시간은 단지 10년 남은 게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의업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고―그것도 모든 잊고 의학 서적 속에 묻혀 살기도 그렇습니다만―그외 내 삶에 얽힌 잡다한 것들을 단순화시켜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옛날에 손댔던 일들, 수석, 난 키우고, 서예하고, 검도하고 ―최근에는 국선도로 돌았습니다만―고전 음악 듣고 하는 이런 모든 일련의 일들을 다 정리를 해야겠습니다.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처럼 남은 살아 있는 동안은 글만 쓰다 가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직업이 글 쓰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성취를 남기자는 것도 아닙니다. 글 쓰는 동안만은 나를 성찰할 수 있고 또 글을 만듦으로써 얻는 즐거움을 가지는 것뿐입니다. 이백은 아니지만 이백의 흉내를 낸다면 글 쓰고 책 보고 술 마시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다가 인터넷 검색하다가 이홍섭 시인의 「넓고 넓은 바닷가」라는 시를 발견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니다. ’티브이도 끄고/여자도 끄고/차 같은 건 오던 길로 돌려 보내고//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그렇게 지내다 보면//파도 소리에/살아온 내력 같은 것이 쓸려가/밤 새워 몸살 앓는 일일랑은/일어나지 않겠지요.‘
정말 그분의 시처럼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이 되고 싶습니다. 정진규 시인의 부고를 들으면 그럴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