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했습니다

풀꽃의 행복

by 현목

술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렇다고 이백이나 도연명처럼 차원 높은 술 예찬론도 아닙니다. 대학 들어와서 부산서 유학 와 친구들과 어울리면 명동의 ‘오비 캐빈’ 같은 데는 언감생심이고 '황금정홀‘ 같은 데서 막걸리나 먹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술고래까지는 안 가지만 그래도 술이라면 마다하지 않는 편이고 술 마셔도 별로 얼굴에 표시가 나타나지 않아 술자리에 끝까지 남아서 술이 취한 친구를 들쳐업고 하숙집까지 데려다 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술이 세다‘는 평을 얻었습니다.


그런 저도 일생에 두 번 인사불성이 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등학교 3학년 가을이었습니다. 동기동창으로 외과를 수련한 이덕섭 원장이 주선하여 해운대 백사장에서 K여고 여학생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원래 숫기가 없는지라 별로 말은 못하고 애먼 술만 퍼마셨던 모양입니다. 새벽이 되어서 어디선가 멀리서 기상 나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비비고 두리번거렸더니 제 옆에는 이원장이 누워 있었습니다. 기겁을 하고 일어나니 여관집 주인이 웃으면서 우리에게 저간(這間)의 사정을 들려 주었습니다. 밤은 깊은데 해운대 백사장에 학생 두 놈이 일어났다 주저앉고 하여 다가갔더니 고등학생이고 모자에 모표를 보니 그래도 부산에서는 일류고등학교에 다니는 놈들 같아서 무조건 자기 여관방으로 데려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정말 모든 기억이 완전히 끊겼습니다.


다른 하나가 가톨릭 산부인과와 인연이 있습니다. 마지막 인턴을 부평 성모병원에서 했는데 산부인과 의국 환영회가 있는 날에 제가 감기가 걸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하여 숙소에서 누워 운기조식(運氣調食)했습니다. 저녁에 환영회가 있는 명동의 한일관에 도착했지만 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의례하듯이 술병을 들고 교수님들을 찾아가 술 한잔 올리면 반드시 잔이 넘치게 돌아옵니다. 그걸 조금 마시고 퇴주잔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니 한두 잔씩 계속 받아먹다가 어느덧 제가 의식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신 이우영 선생님이 저를 택시에 태워 집에까지 바래다 주었습니다. 지난밤의 일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산부인과 레지던트를 부평 성모병원에서 처음 시작했습니다. 세상만사 다 그렇지만 처음 경험이 언제나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위 교실 회식을 하는데 부평 성모병원 정문 옆에 조그만 식육식당이 있었습니다. 허필형 교수님이 우릴 데리고 거길 가서 ‘제비추리’ 소고기를 주문하여 주셨습니다. 이름도 처음 들었고 처음 먹어본 소고기 맛이었는데 그게 그렇게 맛일 수 없었습니다. 틈만 나면 거길 갔습니다.

전정일 교수님과 같이 회식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술잔에 가득 채워주시는 잔을 두 손으로 받아서 공손히 마시고는 갖은 예의를 다하여 그 잔을 드리고 술을 따릅니다. 술잔이 가득 차자 교수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아직도 주법을 모르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무슨 결례라도 한 줄 알고 사색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르는 저에게 한 말씀이 계셨습니다. “어른에게는 7부를 따르는 거야. 가득 채우면 빨리 죽으라는 소리지.” “아, 네네. 지당한 말씀입니다”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그럼 젊은 사람은 빨리 죽으라는 말인가 하고 피식 웃고는 죽을 죄를 지은 듯이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서 늦잠을 잤습니다. 토요일이라고 생각되는데 택시를 잡아타고 부평성모병원까지 갔었습니다. 회진 도는 내내 속으로 얼마나 캥기는지 몰랐습니다. 눈은 충혈이 되고 아마 얼굴은 부어올랐겠지요. 어서 빨리 회진이 끝나길 바랬습니다. 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전정일 교수님은 미동도 하지 않고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회진이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 벌렁 나자빠지자마자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저 같으면 레지던트 한 놈이 그런 몰골로 하고 와서 회진을 돌면 “야, 너 그 꼬라지가 뭐야”라고 말을 못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싫은 표정을 지었을 것 같습니다. 살아오면서 부평 성모병원에서의 그 때 그 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 속으로 전정일 교수님의 관용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저도 한두 번은 교수님의 흉내를 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꿈 같은 의국 생활, 봉직의를 거쳐 개업하고 지난 2015년 1월부터는 요양병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제 4년째 되는데 레지던트라고 생각하고 지내고 있습니다. 전공이 아니다 보니 고달픈 면도 있습니다. 이제는 약간은 윤곽이 잡힙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게 폐렴, 설사, 낙상에 의한 골절, 그리고 치매의 심리행동 증상입니다. 아직도 배우면서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만 그래도 저의 고향은 애기를 받던 산부인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성가병원에서 일 년차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직하는 하루 24시간 동안 애기를 열 명인가 열한 명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는 긴 장화에 고무로 된 앞치마를 입고 산실에서 어슬렁거렸지요.


사천에 와서 점심 시간에는 아무도 없는 논두렁을 한 시간 가량 걷다가 들어갑니다. 무료해서 서양음악의 신약성서라고 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을 스마트폰에 사서 들으면서 걷습니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2월부터 큰봄까치꽃, 광대나물, 냉이, 꽃다지, 말냉이, 유럽점도나물, 꽃마리, 주름잎, 쇠뜨기, 둑새풀, 개구리자리…… 줄지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꽃들은 크기가 대개 5미리 내외라서 주의해 보지 않으면, 아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이 있는가 하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미도 있습니다. 30대 때 의국생활을 하면서 청운의 꿈을 품은 적도 있었습니다만 이제 제 인생의 몫을 알게 됐습니다. 사천 논두렁에 있는 이름 모를 풀들이 바로 제 모습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고 좋게 말해서 소박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의 조건에서도 저만의 풀꽃을 피우듯이 행복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조엘 쿠퍼먼은 『훌륭한 인생에 관한 여섯 개의 신화』에서 행복에의 길로 가는 여섯 가지 포인트를 말합니다. 쾌락과 숙련된 기술과 미덕의 실천, 깊은 인간관계와 부러워하는 감정과 자아에 대한 지각을 통해서 자신의 자존감과 만족감, 나아가 행복감으로 느끼는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그저 생각한다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처럼 배우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 가야 합니다. 세상에 쉬운 것은 하나도 없는 법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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