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인생에 관한 여섯 개의 신화』 조엘 쿠퍼먼

‘행복이란 자기 인생에 대해 보편적 긍정의 감정’

by 현목

우리는 생명을 갖고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영위할까 하고 고민을 많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좋은 학력에 거대한 주택과 화려한 외제차를 갖추어 여유 있게 삶으로써 행복을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극한 행복’을 갖춘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그들이 찾은 행복이란 단지 그들이 인생의 생존경쟁에서 패한 자기 합리와에 불과한 것일까요.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쾌락과 행복을 지향합니다. 성취를 위해 자기 나름으로 선택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는 그 사람의 능력, 그때의 운에 의해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떤 위대한 사람도 유한에 걸리게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인생이 나름 행복했었다, 의미가 있었다, 만족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일까요, 권력, 유명세, 자신의 분야에서의 불후의 업적, 혹은 예술 작품일까요. 그 모두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들은 행복에로 가는 길을 더 쉽게 다가가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에의 길로 가기 위해서 거기에는 종교적 관점, 예를 들어 기독교라면 교리, 불교라면 해탈을, 공자, 플라톤 아리토텔레스라면 미덕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혹은 그 전의 생에서 행복을, 인생에 대한 보상을 그려 볼 수도 있습니다.


우선 행복이란 무슨 뜻인지 개념부터 알고 가야겠습니다. 「행복이란 자기 인생에 대해 보편적 긍정의 감정이라고 말했다」라고 조엘 쿠퍼먼은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행복, 행복하지만 쾌락, 만족, 안락함, 즐거움, 등과 같은 말들과 혼용하여 쓰고 있는 형편입니다.


조엘 쿠퍼먼은 인간의 행복의 길을 가는 데 체크 포인트를 여섯 가지 정도를 제시합니다.

첫째는, 쾌락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인생, 즉 보상받았다고 느껴지는 인생이란 극도로 안락(comfort)하고, 즐거운(pleasure)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쾌락은 행복의 지각에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쾌락이 없으면 삶을 지속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성에 쾌락이 동반되지 않는다든지 인간이 섭취하는 음식을 맛보는 데서 오는 쾌락이 없었다면 인간이란 종족은 멸종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쾌락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합니다. 하지만 쾌락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으로 쾌락이 주는 자극에 탐닉하면 파멸을 초래합니다. 이를 쾌락의 쳇바퀴라고 말하고 가장 대표적인 예는 마약을 들 수 있습니다. 그만큼 쾌락의 추구에는 절제가 요구됩니다.


다른 하나는 쾌락을 통하여 더 나은 의미 있는 성취로 나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미 있는 행동, 사고를 위한 동기유발의 수단으로서 인정할 만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쾌락은 필요악처럼 인간에게 필요하지만 그 자체로 인간에게 훌륭한 삶, 혹은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숙련된 기술이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고 합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일본의 장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굽든지 빵을 만들어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면서 그들은 행복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숙련된 일에 몰두하는 순간 자아를 망각합니다. 자신의 분야에 몰입함으로써 얻는 성취로 인하여 자존감을 가질 수 있고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셋째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일입니다. 「미덕이란 중요한 문제에 앞서 유혹이나 커다란 압력에 굴하지 않고 훌륭하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조엘 쿠퍼먼이 말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기를 원하는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환경에서 흔히 말하는 가난한 선비라든지, 혹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욥의 경우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미덕을 발휘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미덕의 실천으로 플라톤은 마음의 조화로, 공자는 마음의 평정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또한 미덕의 실천은 당사자의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넷째는, 깊은 인간관계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혼자서 평생의 삶을 영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태어나면서 부모라는 가족과 교육을 받으면서 만나는 친구, 또는 사회에 진출하여 대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행복을 추구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같은 수준의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모라든지 친한 친구와 깊은 사귐이 있는 것이 자신의 편안함, 만족감에 기여를 하지만 그밖에도 만나는 사람에게 적어도 인간으로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서로 상호 배려하는 마음을 확립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관심사에 흥미를 표하는 것은 사람 사이에 긍정적으로 작용합니다. 데일 카네기는 타인을 결코 비난하지 말라고 했고 맹자는 ‘선을 통해 사람들을 지배하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다섯째는, 부러워하지 않는 감정을 가지는 일입니다. 「쾌락이란 그 자체로 경험하는 것이지 타인의 것과 비교할 뚜렷한 요소를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반면 행복을 평가할 때는 비교의 요소가 끼어드는 게 일반적이다. 보편적 행복이 전체 인생의 상황과 관련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 당하여 무인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다면 그토록 살기 위해서 분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비교할 것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면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여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전략은 ‘마음을 비워라’ ‘기대치를 낮춰라’라는 식입니다. 이것들은 좋기는 하지만 적극적이기보다는 소극적인 대처 같이 보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오불관언하면서 살아가려면 결국은 자신이 오랜 숙고 끝에 이성적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를 통하여 확신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여섯째는, 자아에 대한 자각(sense of self)입니다. 조엘 쿠퍼먼이 정의한 행복의 개념을 다시 상기해야겠습니다. 「행복이란 자기 인생에 대해 보편적 긍정의 감정이라고 말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당사자 ‘자아’입니다.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본인의 자아가 내적 혹은 외적 환경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행복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행복은 남의 평가도 아니고 자신의 표면적인 성취도 아니고 오직 스스로에 대한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아에 대한 자각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가지느냐가 행복을 결정하는 데 중요합니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만난 세계의 유수한 부자 혹은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그 사람들도 말하는 것을 보면 별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들보다 조금 더 안락하고 편안하고 혹은 행복해 보였다고 했습니다. 행복이란 어쩌면 그다지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거대한 산으로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꿈꾸고 생각만 한다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듯이 무언가 뚝 떨어져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게 행복을 몸으로 경험하기 위해서 조엘 쿠퍼먼이 주장하는 여섯 가지의 첵크포인트를 음미하면서 수도승이 노력하듯이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죽음 앞에서 나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