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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목 Nov 30. 2024

내 인생에서 시쓰기란 무엇이었던가?

-‘시(인)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진은영 교수)을 듣고

  한동안 네이버 열린 연단을 통해서 김우창 교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며칠 전 갑자기 열린 연단이 생각이 나서 찾아들어가 보니 진은영 교수의 ‘시(인)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이란 강연이 있어 들어 보았습니다.


  대학교 예과 때 문학동아리에 들어가서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그래도 50년 넘게 꾸준히 시를 써왔습니다. 졸필이지만 시집도 두 권 냈습니다. 어떤 때는 제가 왜 시를 이렇게 집착하는지 차라리 그 시간에 부동산을 사겠다고 눈을 벌겋게 하면서 돌아다녔다면 지금보다 더 돈을 모으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드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쓰기를 놓지 않는 이유를 저도 사실은 잘 모릅니다. 이 강연을 들으면서 저의 정체성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대학생 때 시를 쓰면 어떤 주제도 기교도 알지 못하고 막연히 저의 감정에 떠오른 느낌, 예컨대 쓸쓸함이나 슬픔을 그저 선배가 쓴 시의 분위기 맞춰 써내려간 것뿐이었습니다. 시적 정서만 그럴 듯하면 만족했습니다.

 

  그러다가 2001년 온라인의 ‘포엠토피아‘라는 시창작 교실에서 몇 년을 배웠습니다. 특별히 학문적으로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고 시를 써내면 틀린 점을 지적받고 다시 고쳐쓰기를 하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는 동안 저 혼자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을 요약정리하면서 공부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송재학의 시를 몇 년간에 걸쳐서 베껴쓰고 저나름의 방식으로 분석해 보았습니다. 2019년에는 진주 과기대의 평생교육원에서 시창작교실에 참석하여 2년간 배웠습니다. 시에 대해서 좀 더 세련된 안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불안한 점은 제가 시인으로서 객관적으로 인정을 못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용기를 내어 신춘문예에 두 번 응모를 했으나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이니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골프로 치면 잘 해야 ’보기 플레이어‘다라는 자격지심을 늘 가지고 있은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의 시를 보면 이 시가 잘 썼는가만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만약 그가 월등히 잘 썼다면 열등감을 가지거나 혹은 어떤 시인의 작품이 미숙하면 그것을 얕잡아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이 강연을 듣고 절감했습니다. 


  이 강연은 다른 말로 한다면 시인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진은영 교수의 강연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키워드에 기초한다고 생각합니다. 별종, 마지막 청자, 탁월성, 작업, 행위, 자율성과 타율성, 천재, 결과물, 접촉과 과정, 진실성, 해방된 자입니다. 이 키워드를 가지고 진은영 교수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간단히 요약하고 저의 생각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언사는 진은영 교수가 하신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첫째 시인은 사회적 ’별종‘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어떤 낯선 감각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통해 공동체에 새로운 감각을 창조합니다. 또 시인은 사회의 ’마지막 청자‘입니다. 시인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소리를 경청함으로써 누군가 존재를 드러나게 하고 드러난 존재가 울림을 주는 시를 쓴다고 했습니다.


  둘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Activity)을 노동·작업·행위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노동(Labor)은 삶의 유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활동입니다. 작업(Work)은 무언가를 제작해서 결과물을 내놓는 활동입니다. 행위(Action)은 아렌트가 인간 활동의 가장 위대한 차원이라고 했습니다.


  작업을 통해서 이제껏 거의 모든 예술은 결과물의 탁월성을 추구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 속에 언제나 내적 갈등의 요인으로 작동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인이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시인이라면 자기가 쓴 글에 대한 결과물이 탁월하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좌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그러나 진은영 교수는 탁월한 작품의 제작이 예술의 중요한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존재의 이유일까 하는 의문을 말합니다.


  ’작업‘은 머릿속에 떠오른 관념대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활동입니다. 반면에 ’행위‘는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공공성을 구현하는 것이 ’행위‘라는 것입니다. ’행위‘의 결과물은 행위자의 의도대로 나오지 않고 따라서 결과물은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행위‘는 자기충족적인 성격을 지닌 인간의 활동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부분은 중요한 것 같은데 저는 확실히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진은영 교수는 이 ’행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은영 교수의 꿈은 탁월성을 목표로 하는 작품보다는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만인 시인-되기‘를 소망하므로 ’행위‘로서 시쓰기가 그리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행위’라는 활동을 통해서 시쓰기를 한 사람이 바로 영화 「패터슨」에 나오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과 패터슨 시의 소아과 의사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였습니다.


  셋째 접촉과 과정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883~1963)의 시학을 대표하는 말이 ‘접촉’과 ‘과정’입니다. 윌리엄스의 시쓰기의 내용은 무슨 심오한 형이상학의 내용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사를 시로 쓴 것 같습니다. 메타포라고 하는 어려운 시적 장치가 아니라 평범한 진술이 주조라고 생각됩니다. 


  그의 시 내용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학교에 갔는데 애들 머리에 이가 너무 많아 애들 이를 잡아주라고 학부모에 말했는데 학부모들이 자기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사이가 좋아졌다는 이런 얘기를 시로 썼다고 합니다. 


  윌리엄스는 시의 아름다움은 삶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름다움은 딴 데, 삶과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은 내가 모자를 걸어놓은 곳에 있다”라고 그의 장시 『패터슨』에서 말했습니다. 이처럼 윌리엄스는 일상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요시하고 과정의 시학을 강조했습니다.


  넷째 삶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과 삶이 되려는 예술, 즉 예술의 자율성과 타율성이 있습니다. 삶에서 벗어나려는 예술은 무엇인가요? 공동체의 낡은 감각, 사고를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술은 삶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예술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것은 아렌트의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프랑스의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예술의 자율성과 타율성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이들이 서로 대립한다고 했습니다. 예술의 자율성이란 공동체의 낡은 감각을 파괴하는 예술 활동을 말합니다. 이는 앞서 말한 삶에서 벗어나려는 예술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예술의 타율성은 랑시에르는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자기의 고유한 영역을 벗어나서 예술이 아닌 다른 것, 즉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식의 움직임은 삶이 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방식에 따르면 ‘행위’에 속할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시인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시인이 미적 실험을 실행함으로써 공동체의 낡은 언어를 파괴하고 새로운 감각을 창조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인의 공동체에서 다양한 사람들,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여서 구성원의 삶을 시적 방법으로 가시화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게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이른바 1960년대 우리나라의 순수시와 참여시의 논쟁이 그것입니다.


  랑시에르는 시인의 마음에는 자율성과 타율성의 욕구가 공존한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 둘은 항상 서로 대립하고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고 했습니다.


  다섯 째 진실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톨스토이가 그의 소책자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술적 독창성의 본질은 관심의 진실성에 있다.” 


  진은영 교수는 충북 음성군에 사는 할머니 시인 한충자(86)씨를 의외로 길게 소개합니다. 그녀는 지독히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갑니다. 문맹인 할머니는 죽기 전에 이름 석자라도 쓰고 싶어 결혼하고 50년만에 한글반에 등록합니다. 다 배우고 나서 상급반에 가려고 했으나 그런 상급반이 없어서 그때 있던 시창작반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시를 배우고 시인이 됐습니다. 한충자 할머니는 결혼하고 나서 딱 한번 자기를 찾아온 친정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절절하게 많이 썼다고 합니다. 제가 구글에서 한충자 할머니의 시를 찾아보았습니다. ‘쭈글쭈글한 내 손/씨감자 닮아 세월을 말해주는 것 같다/언제 제대로 만져 준 일 있었나/써먹기만 했지/약 한 번 발라준 적 있었는가/심줄 툭툭 솟아나고/검버섯 꽃잎 피듯 한다’ (「내 손」중 부분) 그녀의 시를 보고 느낀 것은 어찌 보면 미숙합니다. 하지만 압도적인 것은 진실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록 글이 유치하더라고 그 진실성에 감동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섯 째 천재적 재능에 대해서 말합니다. 칸트는 천재적 재능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천재는 예술에 규칙을 주는 재능이다.” 그리고 이것은 천부의 자질이라는 것입니다. ‘천재적 재능’이란 말은 우리가 예술가를 만날 때마다 항상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저런 그림을 그리다니 저것은 천재적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꿈도 못 꾸지.”


  그러나 자크 랑시에르는 천재의 비밀은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보편적 가르침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배우라. 되풀이 하라. 모방하라. 번역하라. 문장을 뜯어 보라. 다시 붙여보라’는 것입니다.


  일곱 째 해방된 자에 대해 설명합니다.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에서 ‘탁월한 작품을 생산해서 위대해지는 것, 이것이 예술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어야 할까?’라고 문제 제기를 합니다. 여기가 저로서는 감명을 받은 대목입니다. 텔레비전을 보다 보면 트롯트 가수들이 나옵니다. 삐까번쩍하는 옷을 입고 노래도 정말 잘 부르는 일류 가수가 있는가 하면 촌스런 옷을 입고 노래 수준도 확실히 떨어진 삼류 가수도 있습니다. 이 삼류 가수가 처량하게 보이지만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없을까 하는 것이 언제나 저의 관심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삼류 시인이기 때문입니다.


  랑시에르는 위대한 화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은영 교수도 말합니다. “위대한 시인이 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여기서 해방은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요? 저는 탁월성, 결과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자유함에 이를 것입니다.


  랑시에르가 ’위대한 예술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시쓰기를 ’작업‘이 아니라 ’행위‘로 본 것입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 관심을 갖는 것을 하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가 해방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라신(1639~1699)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 보통 사람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교수나 평론가를 의식하면서 작품을 씁니다. 그게 아니라 라신은 보통 사람이 읽고 이해하고 감동받기 쉽게 썼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껏 ’낯설게 하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도 비록 서툴렀지만 말입니다.


  진은영 교수의 강연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이 바로 영화 「패터슨」 속의 주인공 패터슨입니다. 영화 「패터슨」은 짐 자머쉬가 만들어서 2016년에 나왔습니다. 미국 뉴저지주의 소도시 패터슨 시에서 버스 운전사를 하는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의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사로 아내 로라와 반려견 마빈과 살고 있습니다. 그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출근하고 버스 운전을 합니다. 퇴근해서 저녁 먹고 서재에 시를 씁니다. 동네 바에 가서 맥주 한잔 먹고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일상을 시로 표현합니다. 그가 쓴 시를 시집으로 내려고 모은 원고를 그의 반려견 마빈이 물어뜯어 없애 버립니다. 그는 그것을 애통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자신이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담담히 쓰는 것 자체가 자기충족적이기 때문입니다. 


  패터슨은 진은영 교수가 말하는 ’마지막 청자‘의 인물이고, ’탁월성‘,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는 ’행위‘의 인물이고, ’접촉‘과 ’과정‘의 인물이고, ’삶이 되는 예술‘, 다시 말해 ’타율성‘의 인물이고, ’진실성‘의 인물이고, ’천재‘가 아니라 천재의 비밀을 실천하는 인물이고, ’결과물‘에서 해방된 인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패터슨 식의 글쓰기만이 정답인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랑시에르가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진은영 교수가 얘기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성공이라는 결과물인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건강을 추구합니다. 이것을 타기(唾棄)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성공을 성취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세속적으로 행복할 기회는 더 많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패터슨이 추구한 글쓰기의 유형이 어쩌면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탁월성,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삶에서 자기충족을 느끼고 해방된 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진은영 교수의 강연은 어줍잖은 시를 쓰는 저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알게 된 계기가 저에게는 새로운 지평을 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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