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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북토크―진정성과 기교

by 현목

역마살(驛馬煞)이 끼었는지 늘그막에 김해 진례에 살게 되었습니다. 북청에서 시작하여 부산, 인천, 부산, 서울, 부산, 서울, 상주, 의정부, 진주, 진례에 이르렀습니다. 2023년 3월에 진례에 와서 직장에 근무하다가 장유 율하 카페거리를 걷게 됐습니다. 걷다 보니 ‘숲으로 된 성벽’이라는 이름의 책방이 보였습니다. 사실 그곳은 책방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에 이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책을 살 만한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숲으로 된 성벽’은 기형도 시인이 시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책방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그 책방을 통해서 북토크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2023년 12월부터 지금까지 세 번 정도 참석했습니다. 북토크는 말만 들었지 어떤 것인지 몰랐기에 궁금했습니다. 북토크의 작가는 인상적인 경우도 있었고 그저그런 느낌도 있었습니다.


요즘 아들이 chat gpt를 모바일에 깔아보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호기심에 거기다가 제가 처음으로 문의한 것은 ‘화포천 습지를 대상으로 시 한 편을 지어 주세요’였습니다. 시 한 편을 지어 보내는데 기도 안 찹니다. 저 보고 써보라고 해도 이처럼 쓸 자신은 없습니다. 50여년 동안 시를 쓴다고 머리 싸매고 애쓴 것이 허망하여져 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앞으로 신춘문예는 어떻게 될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됩니다.


화포천 습지에서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잔잔한 풀잎 위로 햇살이 흐른다./물비늘 반짝이며 속삭이는/고요한 대지의 언어.//철새는 날개로 계절을 그리며/머나먼 길 위에 쉼을 찾는다./갈대는 그 곁을 지키며/작은 떨림으로 안부를 전한다.//이곳은 말하지 않아도 깊은 곳,/시간이 머무는 듯한/한 폭의 풍경./숨결 하나에도 생명이 깃든다.//너는 아는가,/이 고요한 웅덩이에도/우주가 반짝이는 것을.


마음 속으로 좌절도 느끼고 의욕이 가라앉는 순간, ‘숲으로 된 성벽’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김사인 시인의 강연이 있다고 안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참가비를 내고 신청했습니다. 요즘은 유튜브에 없는 게 없으니 ‘김사인’이라고 치니 그가 하는 강연과 시 작품들이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진정성과 기교’라는 문구였습니다.


드디어 북토크가 열렸습니다. 김사인 시인은 1956년 생으로 현재 나이 69세입니다. 서울대학 국문학과를 나왔고 젊어서는 ‘운동권’에서 활동을 한 것 같습니다. 그 후는 출판사 등을 거쳐서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오래 역임하다가 은퇴했습니다.


그는 유튜브에서 보든 것처럼 선량하게 생기고 말이 어눌하고 무엇인가 ‘샤이’한 모습이었습다. 그가 텍스트로 준 프린트물에는 11편의 시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 시들은 『김사인 함께 읽기』에 나오는 시들을 발췌한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그의 시를 제 방식대로 감상하는 방법인 ⓜ(metaphor), ⓢ(statement), ⓢ‘(simile)으로 체크해 보았습니다. 11편 중에서 2편 정도 빼고는 시의 행들이 거의 다 진술이었습니다. 그는 제 방식의 시 감상을 질색합니다. 그가 강연 중에 한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습니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처럼 시를 너무 빨리 읽지 마라.” 시를 서정에 맡기고 오래 몸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의 시는 대부분 진술형의 문장이고 메타포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풍경을, 혹은 마음 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저 담담히 적어 나갑니다. 거기에 굳이 기교를 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완성한 시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진술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가 원관념이 되어 우리가 상상하는 메타포의 보조관념으로 연결되어 우리에게 어떤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다시 말해 서정이나 의미라는 대상과 연결되어 감동이 잔잔한 바람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이것은 그림으로 치면 사실화(寫實畫)와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를 읽으면서 김사인 시인의 진정성이 저절로 몸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동시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여기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진정성, 순수한 마음은 자칫하면 유치할 수 있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의 평범한 시를 이름을 가리고 신춘문예에 제출한다든지, 독자들에게 보이고 평가를 한다면 과연 어떨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정주 시인도 말년에 쓴 시가 이처럼 평범한 진술 위주의 문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서정주 시인의 위광(威光)이 아니었다면 그런 시들이 제대로 평가를 받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기야 이런 것은 시만이 아니라 세상만사 돌아가는 이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술 작품―시도, 그림도, 음악도―은 작가의 진정성이 있어야 하지만 그것과 겸비하여 거기에 걸맞는 기교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흐나 세잔의 그림은 사실화가 아닙니다. 유화로서 사물의 형태가 변형(metamorphosis)되어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변형’은 시로 치면 메타포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메타포야말로 상상과 발견이고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하는 정신적 이미지―감각적 이미지가 아니라―인 것입니다.


베토벤이 클라식의 대가라고 합니다. 서양음악은 베토벤이라는 에베레스트산이 있고 그 외 기타 등등의 산이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베토벤의 진정성―그의 인생에 대한 고뇌, 슬픔, 환희, 운명이 단순한 사실화처럼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음악적 기교가 뒷받침되었다고 믿습니다. 제가 음악에 대한 소양(素養)이 없어서 그 기교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절대로, 절대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사실화는 열등하고 유화만이 그림의 정도(正道)라고 말해는 안 됩니다. 다만 각자의 취향에 따라 길이 다른 것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열의 문제가 아닙니다.


책방에 간 김에 인사치레라도 할 겸 시집을 하나 샀습니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 시집 뒷장을 보니 2015년에 출간됐는데 2025년에 18쇄를 했다고 나옵니다. 깜짝 놀랬습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비교할 주제도 안 되지만 저는 시집 하나 내는데 자비로 출간했고 그나마 얼마나 팔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샘도 나기도 하여 chat gpt에게 물었습니다. ‘돈이 되는 시는 어떻게 써야 할까요?’ 대답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짧고 강한 이미지. 여기에 해당되는 시인이 나태주, 류시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둘째 감정 공감. 위로, 사랑, 자기발견의 언어이어야 한다. 셋째 공모전과 출판기회를 적극 활용한다. 넷째 자신만의 브랜드 만들기 다섯째 진정성을 유지하라.’ 다시 말해 한마디로 말한다면 쉽게 쓰라는 말 같습니다.


아무튼 김사인 시인은 시를 떠나서 인품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의 선량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시세계를 독자에게 더욱 다가가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밤에 쓰는 편지』에 나오는 진술 위주의 시 ‘옥동의 한 아이에게’와 진술형이 아니라 나름 어렵다면 어려운 그의 시 ‘달팽이’를 소개합니다. 『어린 당나귀 곁에서』 시집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시입니다. 시인 자신도 은근히 자랑한 시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달팽이가 천천히 기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도 시를 한번 지어보자고 마음 먹은 적이 있어 더욱 마음에 남았습니다. 두 가지 형태의 시를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옥동의 한 아이에게」보다는 「달팽이」 스타일의 시를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옥동의 한 아이에게/김사인



춥지 않으냐.

외진 신작로 마른 먼짓길

오똑하게 혼자서 가고 있는 아이야.

해진 팔꿈치와 옷소매

쩍쩍 터 갈라진 네 조그만 주먹을 보며

꼬옥 움켜진 낡은 책가방을 보며

내 가슴은 사정없이 무너지는데,

코끝에 성가신 콧물을 문지르며

씩 웃는 네 얼굴은 말 못할 맑음으로 눈부시다


목숨의 소중함과 사랑을 떳떳이 말하지 못하여,

이제 내가 할말은

'춥지 않으냐'는 물음뿐.


추위와 가난을 썩 앞질러 야무지게 걸음을 옮기는

조그만 등에 대고,

네가 자라 더 거센 추위가 닥칠지라도

오늘의 이 눈빛 잃지 말고

힘차게 북을 치며 나아가라고

속으로만,

그러나 목이 터져라 나는 외치는데


들리느냐, 아하 우리의 아이야.



달팽이/김사인



귓 속이 늘 궁금했다


그 속에는 달팽이가 하나씩 산다고 들었다

바깥 기척에 허기진 그가 저 쓸쓸한 길을 냈을 것이다

길 끝에 입을 대고

근근이 당도하는 소리 몇 낱으로 목을 축일 것이다

달팽이가 아니라

실은 도적굴로 붙들려 간 옛적의 누이라고도 하고

골방에서 평생을 난 앞 못 보던 외조부라고도 하지만

슬프고 옹색하게 생긴 저 구멍 너머에는

누구건 다 달팽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달팽이는

천 년쯤을 기약하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한다

귀가 죽고

귓속을 궁금해 할 그 누구조차 사라진 뒤에도

길이 무너지고 모든 소리와 갈증이 그친 뒤에도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달팽이는 오래오래 간다는 것이다


망해버린 왕국의 표장(標章)처럼

네 개의 뿔을 고독하게 치켜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듬더듬

그토록 먼 길을


마지막으로 chat gpt의 김사인 시인의 주요 시적 특성에 대해 밝히는 코멘트를 소개하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 사회적 현실에 대한 윤리적 감수성. 김사인의 시는 일상 속의 고통받는 이들,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합니다.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조용한 연민과 사유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환기시킵니다. 둘째 절제된 언어와 낮은 목소리. 김사인의 시는 과장이나 장식이 적고, 조용하고 절제된 문체가 특징입니다. 그는 자극적인 표현보다 조용한 음성으로 독자에게 스며들 듯 말을 겁니다.셋째 삶과 죽음,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 김 사인의 시에는 삶의 비극성과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이나 냉소로 빠지지 않고, 끝내 연대와 사랑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넷째 일상성과 시적 긴장의 공존.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장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그 속에서 존엄과 비극의 기미를 읽어냅니다. 작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 속의 아픔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다섯째 육성과 윤리의 시학. 그는 시를 통해 자기 육성(肉聲), 즉 몸으로 겪은 목소리를 전달하려 합니다. 이는 관념적 시각이 아닌, 살아있는 감각과 경험에 기반한 언어를 지향함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시는 타자에 대한 책임과 응답으로 기능해야 한다는 윤리적 태도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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