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작품에는 끌림이 특별히 없었습니다. 그는 소설가이지만 저는 평생 부족하지만 시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웬지 그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는 저의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그가 쓴 『이순신』 등의 역사 소설을 읽어볼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에게 묘한 매력과 글쓰기를 향한 진심 어린 자세에 많은 감복(感服)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어디선가 본 그의 문구가 있습니다. “나의 삶은 문장 속에 있고 그 외는 모두 내게 사소하다.” 글쓰기에 대한 재능은 없어도 저의 남은 인생을 어떻게 글쓰기를 할까 하고 마음 속에서 길을 찾아오던 저로서는 가던 길에 한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그의 소설책이 아니라 에세이를 보고 산 책이 『섬진강 일기』와 『아름다움도 지키는 것이다』였습니다.
『섬진강 일기』를 다 읽고 나서 저의 머리에 뚜렷이 남는 주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나의 삶은 문장 속에 있고 그 외는 모두 사소하다.“ 둘째 ”관찰한다. 생각한다. 셋째 “이젠 하염없이 걷고 원 없이 쓰고 싶다.”
그의 인생이 (그는 1968년 생이고 책 출판이 2022년이니까 54세 때 일이네요) 오로지 글쓰기(소설)에 혼신(渾身)을 다하는 모습이 저로서는 부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런 생각은 많이 하지만 사실상 그런 식으로 실행은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어떤 모습으로 글쓰기를 하는지 그의 책에서 보겠습니다.
“나는 오래 머물며 논저와 자료들을 잔뜩 쌓아놓고 일하는 쪽이다. .. 내게 1이 씨앗의 숫자라면, 10은 준비의 숫자다. 쓰고자 하는 글감과 관련한 책 열 권을 사서 읽을 것. 구상 단계에서 떠오른 생각과 느낌을 공책 열 권에 정리할 것. .. 40분 글쓰고 20분 쉴 때마다 해바라기에게 가봐야겠다. 오늘은 노랗게 쓰자. .. 창작에만 집중하는 시간과 공간은 작가에게 소중한 선물이다.‘
그가 글쓰기(소설)에만 몰입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그냥 기억을 더듬어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기 위한 자료와 논저를 쌓아두고 읽고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자료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독서가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읽은 자료는 작가의 뇌에 저장되어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뇌는 또 다른 이미지나 의미를 창출할 것입니다.
그는 글쓰기가 직업입니다. 그러한 업무를 통해 돈을 벌고 먹고 삽니다. 다시 말해 은행원이나 공무원처럼 자신의 집필실(사무실)에 앉아 자신의 업무(글쓰기)를 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나서 섬진강을 걷습니다. 그는 통상 40분 업무를 보고 20분 쉰다고 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글쓰기 루틴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5~6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글을 씁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원고지 20매를 작성한다고 합니다. 집필 후에는 10km를 달리거나 1,500m 수영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감탁환도 글쓰기에 루틴이 있었습니다. ”글을 쓰기 전에 세 가지 루틴을 해왔다. 더운 물에 손을 넣고, 커피를 내리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트는 것.“ 그의 책 곳곳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얘기가 단편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클래식 음악의 감상에 조예(造詣)가 있지 않나 하는 추측이 됩니다.
둘째, 김탁환의 말 중에 저에게 가장 감명을 주었고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관찰한다. 생각한다.“입니다. 생각하고 나서 관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김탁환이 관찰하고 생각한 얘기들이 책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제게 인상적이었던 글귀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곡성에 오니 솔방울이 자주 눈에 띈다. .. 몇 개는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집필실로 가져다 놓는다. .. 그런데 그렇게 가져온 솔방울들이 스스로 움직인다. .. 솔방울들이 내게 말을 거는 방식이라고 간주한다. 솔방울뿐이랴. 책상도, 의자도, 삼면을 두른 책장도, 그 책장에 꽂힌 책들도 전부 나무다. 내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더라도, 저들 역시 솔방울처럼 움츠리고 부풀며 서로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지내왔을지 모른다. .. 사방을 두른 먼 산들과 그 위로 활짝 펼쳐진 하늘을 보노라면, 내 몸과 마음도 덩달아 열리는 듯하다. .. 구름의 위치과 모양과 개수와 움직임이 날마다 다르다.‘
여기서 보면 김탁환은 솔방을 관찰하고 그 다음 솔방울을 가지고 생각(상상)합니다. 솔방울이 움직인다, 말을 건다, 등등입니다. 저도 산에 가면 도토리 열매를 줍고 편백나무 열매도 가져옵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아두지만 저는 관찰과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둠이 깃들자 개구리들이 더 많이 운다. 창을 닫아도 울음이 밀고 들어온다. 창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빛 한 줌 없는 들녘을 본다. .. 이 울음을 그칠 방법을 모른다. .. 울음이 안개처럼 다가와선 내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든다. 오늘은 그만 쓰고 한 시간 쯤 울음에 취하기로 한다. .. 묘한 건 가까이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보다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가 더 또렷하다는 것이다. .. 내 울음도 그럴까.‘
저는 주중에 진례에서 삽니다. 여름이면 밤이 되어 개구리 울음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김탁환처럼 관찰하고 상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이 여름밤에 개구리가 지독하게도 울어 쌓네“ 그 걸로 그칩니다.
’농부는 빛이 그리울 땐 고개를 숙인다. 비도 빛나고 보리도 빛나고 상추도 빛나므로, 햇볕에 반사된 빛이라고 간주하는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햇볕을 받으며 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식물들의 빛이 모두 해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벼와 보리와 상추가 자라며 뿜어낸 빛이 농부에게 닿은 것이다. .. 벼와 보리와 상추가 만든 빛과 어둠의 이야기를 품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그런 사람이이었다.‘
이 문장들은 글쓰기 힌트를 주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서 본 것들, 예컨대 벼, 상추, 보리를 보는 순간 그것을 가지고 상상하면서 자신의 일상과 연결시키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제가 걸으면서 지금 한창 피는 벚꽃을 보았다면 그때 벚꽃의 색깔, 모양, 나무의 모양, 일기(日氣)의 모양—하늘, 구름, 바람, 그때 마침 지나가는 새 등등을 가지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바람이 휘젓고 비가 내리쳤으며, 개구리로 시끄러운 밤과 참새로 부산한 아침이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걷는 곳에서 참새가 많이 날아갑니다. 혹은 날아듭니다. 이것을 그냥 날아가는구나 하고 생각에 그치지 말고 감탁환처럼 문장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예컨대, ‘오랜만에 오네요.’ ‘네, 이렇게 날아오는 것이 나의 손님 접대법이라오.‘
’11월의 메타세쿼이아가 내게 묻는 듯 하다. 마음의 빛깔이 달라졌냐고. 제철 채소, 체절 과일처럼 마음을 먹을 것.‘
저는 이게 이제껏 안 되었습니다. 수도 없이 메타세쿼이아를 보면서도 그저 한편의 풍경으로만 보아 왔습니다. 이걸 김탁환작가처럼 문장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기 위해서 교회 버스를 기다리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는 메타세쿼이아가 아파트 주위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나무를 매번 만나면 ”이놈에 메타세쿼이아는 키는 우라지게도 크구나.“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데 그쳤습니다. 그 메타세쿼이아를 가지고 제 인생과 연결시키면서 상상하며 김탁환처럼 문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번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를 읽고 제가 가장 제 마음에 남는 부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탁환은 ’하염없이 걷고 원 없이 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단지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하고 감동하는 데 그치면 그것은 글쓰기에 별로 이득이 없습니다. 새로운 이미지 혹은 의미를 창출하는 문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탁환의 걷기는 글쓰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걸으면서 관찰하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푸는 것은 뇌의 일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그 일의 절반 이상을 두 발이 한다. 어디를 얼마나 돌아다니느냐에 따라, 혹은 내가 돌아다녔던 곳을 또 어떤 존재와 돌아다니느냐에 따라, 화두를 풀어가는 방식과 결과가 달라진다.‘
’장편 하나를 마치면 일주일에서 열흘을 걷곤 한다. .. 빨리 걸어야 운동이 된다지만 나는 운동하러 걷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논의 윤슬도 살피기 위해서이니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
걷기를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걷는 것을 운동이라고 생각하여 건강을 위해서는 땀이 날 정도로 빠른 속도로 걸어라고 권하는 것을 인터넷에서 권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저도 그렇지만 김탁환도 빠르게 걷지 않습니다. 김탁환은 ’나는 운동하러 걷는 것이 아니라 나무도 보고 새소리도 듣고 논의 윤슬도 살피기 위해서이니 느릿느릿 걸음을 뗐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건강보다는 우선 관찰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에서 걷는다는 것은 무얼 의미할까요? 자연은 모든 생명체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걸으면 우선 산다는 것의 신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앉아서 참선하는 것을 좌선이라고 한다면 행선(行禪)은 걸으면서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여 걸음걸음 마다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어줍잖으나 저는 걸으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다고 살면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에서 자유로울 정도로 격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만 자연을 보면 생의 본질을 보는 것이니 자연히 마음이 편안을 유지하면서 어쩌면 삶의 본질에 자기도 모르게 닿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깨닫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이라는 생각입니다. 일반 동물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것입니다. 이것만 충족되면 동물은 적어도 행복합니다. 그러니 10평 아파트보다 100평 아파트에 거주하는 것이 편안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부유함과 가난함의 차이는 오직 편리함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도 시장 같은 데서 상인들이 내뱉는 말을 듣습니다. ”아이고 내가 먹고 살라고 이짓을 하는 거지.“ 그만큼 먹는 것은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중요합니다.
또한 인간은 행인지 불행인지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데 그치지 않고 뇌의 발달로 인해 문화와 문명을 발견하고 발달시켰습니다. 사실 인간이 동물보다 잘났다고 자랑할 것은 이것뿐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보면서 걸으며 이것을 생각하면 사람도 동물의 차이를 해결하는 열쇠가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는 인간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지만 가장 정직한 대답은 ’모릅니다‘입니다. 모든 것이 저기 흘러가는 구름처럼 보이는 것은 덧없고 실체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를 읽으며 글쓰기의 전문가도 아니고 다만 글쓰기의 달인들을 선망하는 아마추어로서 김탁환의 글쓰기에 대한 태도, 자세를 보면서 많은 공감을 느낍니다. 김탁환처럼 글쓰기 루틴을 거쳐서 매일 3,4시간의 글쓰기를 할 자신은 저는 없습니다. 김탁환의 ’내 삶은 문장 속에 있다.”는 말은 지극히 공감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그것은 저에게는 너무 벅찬 과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의 조언, ’관찰하고 생각한다‘는 저에게 많은 시사(示唆)와 용기를 줄 것 같습니다. 나이를 감안(勘案)하여 앞으로 얼마나 더 걸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김탁환의 ’하염없이 걸으면서 원 없이 글을 쓰고 싶다‘는 말에 의지하여 관찰하고 생각하자는 소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