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시가 있으니까'
에드문드 힐러리가 1953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왜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하느냐?(Why climb Everest?)"라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을 이제까지 저는 에드문드 힐러리가 한 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힐러리보다 30년 전에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정상을 600미터를 남겨놓고 죽은 조지 말로리라는 분의 명언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시를 씁니까? 소설도 있는데 우리는 굳이 시를 왜 더 좋아하지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간적 경과에 따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관념, 예컨대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 감동을 갖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시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의미보다는 언어적인 감동을 목표로 합니다. 말하자면 언어 자체에 승부를 거는 것입니다. 한 행의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이지요. 소설을 장거리 달리기라고 한다면 시는 백 미터 달리기라고 할까요?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말을 한 분이 있습니다. 폴 발레리가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는 무용이라고요. 무용도 스토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용은 한 순간 한 순간의 아름다움이 우리를 집중하게 합니다.
우리가 한 행 한 행에 그토록 목숨을 걸고(?) 고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송재학은「애월 바다까지」라는 시에서 애월의 짙은 안개가 낀 길들을 목관악기에 비유했습니다. ‘길 전체가 목관 악기인 애월에서의 해미 같은’ 이 행을 읽으면서 그 시가 주는 최종적인 의미보다 그 한 행 자체에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안개의 희뿌연한 길의 모습과 목관 악기의 목이 잠긴 소리 사이의 그 유사성과 함께 골목마다 목관 악기 소리와 안개가 돌아가는 상상에 빠졌었습니다.
시를 언어적인 면에서가 아니고 인식론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명 현상은 우리의 몸과 함께 정신도 같이 성장시켰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처음 시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외부에 있는 세상, 더 크게는 우주를 알고 싶어 합니다.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개체의 바깥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 근본을 알기 위한 인간의 정신적 작업으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신학으로, 문학으로, 역사로, 철학으로, 경제로, 과학으로…… 참으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 알려고 하는 본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알려고 하는 노력의 제일 한 쪽에 있는 것이 과학이라고 합니다. 과학은 사실을 증거에 의해서 증명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과학의 제일 반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시라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시는 가장 비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인식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시는 그 언어를 사용하여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를 가지고 존재를 알려고 합니다. ’이미지‘의 특징은 명료성이 아니라 애매모호함입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이미지‘를 통하여 존재의 본질에 언뜻언뜻 다가가며 체험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를 쓰는 중요한 이유라고 합니다.
시의 깊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그런 경지에 도달하고 싶어 하겠지요. 깊다(deep)는 말의 반대는 얕다(shallow)입니다. 피상적(superficial)이라고도 하지요.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이, 관점이 상투적이고 진부하다는 말과 다름 아닙니다. 예컨대 ‘장미꽃이 오월의 신부처럼 아름답다라’고 썼다고 합시다. 이런 말은 누구나 쉽게 합니다. 어디서나 다 통용이 되고 그 말을 듣고 특별히 감동을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장미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하면 이야기는 다릅니다―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와의 추억을/ 한 장 한 장 칼로 베어/핏빛으로 피었다’라고 한다면 적어도 상투적으로 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가 있다고 할 수도 있겠고 문학적 수사로는 ‘낯설게 하기’가 됩니다. 물론 그 ‘낯설게 하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이겠지요.
이렇게 깊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자신만의 상상력을 요합니다. 깊이 있게 하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자신의 글에서 진부한 표현은 제거시킵니다. 물론 한 행 한 행을 낯설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시 전체를 평범한 사실적 기술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 전체가 ‘낯설게 하는’ 메시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더 어렵다면 어렵다고 봅니다.
우리는 왜 시를 씁니까? 조지 말로리의 말처럼 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까? 에베레스트 산처럼 시는 가시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곳을 자꾸 올라가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유식한 말로 하면 언어적 쾌감과 이미지를 통해 존재의 신비에 다가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