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즐거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은 자기목적성이다

by 현목

이 책은 1997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고 한국 번역본은 2005년입니다. 2021년에 44쇄이라고 하니. 독자들에게 얼마나 호소력이 있는 책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저는 2018년에 처음 읽어봤습니다.

원래 제목은 ‘Finding Flow’인데 의역을 해서 ‘몰입의 즐거움’이라고 했는데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 제목이 딱히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몰입’의 목적은 즐거움이 아니라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것이 나중에 책에 나옵니다.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태어나서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는 자아가 생깁니다. 그 ‘자아’는 죽을 때까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역사 이래로 그래왔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을 세 가지 면으로 이해했습니다. 생물학적·사회적·문화적이 그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생물학적으로는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한낱 하찮은 풀이든, 나무든, 밀림의 개코원숭이든, 존엄한 인간이든 생명이라는 차원에서는 동일합니다. 다만 그 차이는 인간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영원히 이해할 수는 없으며 죽을 때까지 의문으로 남습니다.


생물체로서의 생존은 먹고, 번식하는 데서 그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존을 넘어서 사회망을 만들고 문화를 이루어내었습니다. 우리는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고 더 나은 삶을 지향합니다.이 책은 몰입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이야기는 전개하나 저는 한 가지에 포커를 맞춰서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삶의 질을 끌어올린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몰입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바람직한 삶,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첫째,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것은 경험의 내용입니다. 경험의 내용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와 바람직한 경험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충당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예컨대 수동적 여가에 시간을 많이 할당한다면 삶의 질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삶의 질은 70년, 80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그 시간 속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경험의 내용에는 대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생산활동(행복감은 별로나 몰입은 뛰어나다), 유지활동(행복감, 몰입은 별로 볼 수 없다), 여가활동(능동적 여가는 행복감과 몰입 보이고 수동적 여가는 행복감, 몰입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이 있습니다. 섹스•휴식•TV시청•음식은 정도가 심하지 않을 때는 삶의 질을 끌어올리지만 그 효과가 누적되지는 않습니다.


둘째,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 목표를 세우지 못할 경우 우리는 행복의 겨우 일부만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행복이라는 감정에 목표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세워서 그곳에 몰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칙센트미하이는 말합니다.


삶의 질을 끌어올려주는 것은 내적 동기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가 외적 동기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가 목표를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칙센트미하이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 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없이 자아를 만들어 나가기 어렵다.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서 질서가 생긴다. .. 개성있는 자아로서 눈앞에 나타난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우리는 그런 행위를 자기목적적(autotelic)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행위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한다면 그것은 외재적 목적성입니다. 모든 일에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의무감에서, 필요에 의해 내키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식도락을 즐긴 결과 행복에 겨운 생활을 한다고 해서 행복한 삶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을 높이고 우리의 가능성을 채워 우리를 성장시키면서 행복을 맛보는 것입니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이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칙센트미하이는 말합니다.


목표를 세웠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했습니다. 목표(욕망]를 적절히 세워야 합니다. 무조건 욕망을 억압해서도 안 되고 욕망에 종속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이 목표는 더한 목표도 아니고 덜한 목표도 아닙니다.


셋째 집중하는 요령을 알지 못하면 정신력은 지리멸렬해집니다. 집중할 수 있는 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집중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것, 예를 들어 아이들이 게임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집중을 하는데 그 이유는 즐겁고 재미가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감정의 차원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명감, 혹은 의무감이 강력할 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건 지성과 이성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몰입(집중)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는 이해해도 실제 생활에서 몸으로 작동하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넷째 삶을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입니다. 칙센트미하이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우선 몰입의 키워드는 목표와 집중과 즐거움이라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목표가 있어야 한다. 둘째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즐거움(행복)이 생긴다라는 것이 이 책의 대전제입니다. 몰입은 과제의 난이도가 높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때 몰입을 경험합니다. 몰입은 능동적 여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에서 요가, 무도, 섹스, 음악, 지적활동 등이 있다고 했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몰입의 예를 스키 할강을 들고 있습니다. 스키 활강에는 몇 가지 체크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키는 산을 내려간다는 목표가 있습니다. 둘째 스키는 집중하지 않으면 사고가 날 위험이 있어서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셋째 스키는 활강이 목표이기도 하지만 내려가는 그 자체에서 즐거움, 쾌감을 느낍니다. 사실 이런 즐거움, 쾌감이 없다면 목표를 세우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시키나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나의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주의를 흩뜨리는 요인들이 수도 없이 발생합니다. 자신의 건강, 직장에서의 문제, 배우자와의 관계, 자식이 일으키는 문제, 다른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이런 목표 이외의 요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요? 실제로는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섯째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일의 성격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일은 인간이 수렵시대의 먹거리 조달, 농경시대의 노동, 산업혁명시대 이후의 숙련활동에서 인간의 독창성, 창의성 구현의 활동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또 일에는 이중성이 있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라고 이해하지만 일하는 동안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인생을 길게 보고 보수만을 목적으로 삼지 말고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하라고 조언합니다.

여섯째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영역이 일 이외에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남들과의 인간관계입니다. 인간관계를 원만히 이루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일, 인간관계 둘 다 중요하지만 집중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저로서는 둘 다 만족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일곱째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시간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리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요인들을 머리로는 잘 이해해도 몸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한 방해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저 자기가 좋아서 한다고 스스로 암시합니다. 둘째 시간을 잘 할당하여 잘 관리하도록 합니다. 셋째는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정신에 질서를 줍니다. 다시 말해 주인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언제 대체로 행복감을 느끼는가 하면 먹을 때, 능동적으로 여가를 즐길 때, 남들과 대화할 때라고 합니다. 이 책에서 발견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나깨나 염원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이성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만족해 하는 긍정적 감정입니다. 재산 건강 명예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나 눈이 시뻘개서 평생 찾아헤맵니다. 인간은 불행해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꾸 강변하고 위로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개관적으로 초라하더라도 자신을 불행하다고 믿으면 자신의 삶의 토대를 잃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해야 할 행동은 자살을 하든가 우울증에 걸리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어찌 보면 행복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언가요? 동물은 자아감각이 없고 인간은 있습니다. 자아감각이 없는 동물은 생물학적 욕구가 충족되면 그 선에서 멈춥니다. 그러나 권력이나 재산에 뿌리를 둔 자아상을 발전시켜온 인간은 끝임없이 이익을 탐합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바로 이런 자아상을 불행의 씨앗이라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 자신입니다. 이것을 위해 의식을 통제하고 정신에 질서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교의 참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항구적인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한 사람은 진정으로 충실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마틴 셀리그만처럼 칙센트미하이도 종교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전통종교가 아닌 새로운 틀을 제안합니다. 즉 전통 종교의 지향성은 인정하면서도 초월성을 가진 목표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려고 합니다. 현대인은 과학을 통해 물질적 과제를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 갈등을 풀어갑니다. 이들은 개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진리를 잘 믿지 않으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과학적 진리와 민주적 결정의 상식 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계시만을 신뢰하려고 합니다.


칙센트미하이는 이런 해결방식(즉 과학과 민주주의의 전제하의)의 사고를 진화론의 방향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생태계의 생명구조가 점점 복잡해지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진화)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혼돈이 지배하는 우주가 아니라 의미 있는 줄거리를 가진 우주를 발견했습니다. 그 점을 가장 간파한 사람이 신부이면서 고생물학자였던 데야르 드 샤르댕이었습니다. 그는 수십억 년 전의 원자 알맹이로부터 마음과 정신이 이른바 오메가 포인트로 통합되어가기까지의 장대한 진화의 드라마를 그렸습니다. 오메가 포인트는 영혼과 우주의 초월적 존재(신)가 합일되는 점을 뜻합니다.


진화론자들은 생명체가 스스로 자연에 적응하면서 점점 복잡한 쪽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이 생명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랬는지는 몰라도―우연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지만―생명체는 끝없이 진화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진화가 어떤 무질서가 아니라 복잡하면서도 질서를 추구해 간다는 데서 오히려 어떤 ‘신적 인 것’을 발견하였다는 말 같습니다.


진화의 큰 틀 안에서 일상생활의 의무에 집중할 때의 몰입 경험은 우주의 미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칙센트미하이의 우주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칙센트미하이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몰입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자의 처한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어떻게 제거할까가 제일 관심이 있었습니다.


몰입은 왜 할까요? 칙센트미하는 바람직할 삶, 질이 높은 삶을 위해 몰입을 하라고 합니다.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서 몰입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만 누구나 다 결과에 대해서 관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지력도 다르고 의지력도 다르고 신분도 같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은데 같은 몰입의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코스모스로 태어났으면 옆에 장미나 백합을 부러워하지 말고 코스모스로 살아라고 말입니다.


이 몰입을 볼 때마다 기억나는 티비 장면이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어릴 때 뇌손상으로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30대 장애인 여자 얘기였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기능은 입술로 기구를 잡아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요양사가 먹여주어도 되는데 굳이 입으로 숟가락에 밥이나 반찬을 얹어서 먹었습니다. 공책에 글을 쓰기 위해―물론 그것도 연필을 입으로 물고 쓰지만―연필을 기계로 깎는데 땅바닥에 엎드려 무려 세 시간 동안 기계를 겨우겨우 돌렸습니다. 그녀가 한 것은 오직 몰입이었습니다. 결과는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지만 그녀가 추구한 것은 모르긴 해도 그 어떤 누구의 몰입보다 못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므로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몰입을 해도 결과물은 같을 수 없습니다. 같은 몰입이라고 해도 학자나 스시 요리사나 운동선수나 위에서 말한 장애 여자가 결과물이 다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몰입하면서 삶의 가치를 창조해 나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몰입이란 자기목적성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