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은 여유와 자유의 시간이다’
올리버 색스(Oliver Sacks)는 193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의사가 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했습니다. 말년에 콜롬비아의과대학 신경과 교수를 역임하다가 9년 전에 발병한 안구흑색종이 2015년에 전이되어 향년 82세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태인이었고 두 분 다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종교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신경과 의사이면서도 치매 등 저술을 하여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그의 치매에 대한 책에 흥미가 있어 관심을 갖게 되어 읽었습니다만 서양 사람한테는 별 것 아닌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책자 『고맙습니다』는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 책이 2015년에 출판되었다고 하니 거의 마지막 유서 같은 책의 느낌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그리고 지금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걸 읽자 당혹스러웠습니다. 수많은 저서와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란 칭호까지 받고 있는 분이 이런 말을 하다니 같은 의사인데 저는 평생 무얼했지 하는 자괴감이 앞섭니다. 요즈음은 그런 걸 내려놓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만, 오죽하면 자기 합리화를 하려고 ‘뱁새의 걸음도 아름답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을까요.
“여든 살이 되면 쇠퇴의 징후가 너무나 뚜렷이 드러난다. 반응이 살짝 느려지고, 이름들이 자주 가물가물하고,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한다.” 이런 말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오래 사용하여 여기저기 녹이 슬고 삐걱거린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절망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올리버 색스가 말합니다.
“아버지는 나이 들수록 자신의 정신과 시야가 위축되기는커녕 넓어진다고 느꼈다. 여든 살이 된 사람은 긴 인생을 경험했다. .. 이제 덧없는 것을 좀 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아마도 아름다움까지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된다. 여든 살이 되면 이전 나이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장기적인 시각과 자신이 역사를 몸소 살아냈다는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된다. 나는 노년을 차츰 암울해지는 시간, 어떻게든 견디면서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간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년은 여유와 자유의 시간이다.”
저도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차에 휘발유를 넣어야겠다고 생각해도 금방 잊어버리고 차를 달립니다. 생각날 때 핸드폰의 ‘미리알림’에 적어놓아야 합니다. 대신 감히 말하건대 뭔가 사물을 보면서 종합하는 능력이랄까, 사물의 이치를 넓게 보는 것은 젊었을 때보다 좀 더 밝아지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마침내 갈 때가 되면 프랜시스 크릭이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순간까지도 일하다가 갔으면 좋겠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프랜시스 크릭은 DNA 이중나사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그 일로 두 사람은 노벨 생리의학상을 탔습니다. 나이 들어 죽음의 지평선이 언뜻언뜻 보이기 시작하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냈으면 하는 바램이 생깁니다. 프란시스 크릭은 일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모양입니다. 색스는 자기도 그랬으면 하고 바랬습니다.
병원에서 인간이 사망하는 모습을 하도 많이 본 저도 생각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암이나 지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 사람의 모습은 보기에도 힘이 듭니다. 간호사가 밤에 라운딩(rounding)하다가 자면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스르르 목숨을 다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것이 이른바 오복 중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에 해당합니다. 될 수 있다면 이런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세상만사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초점과 시각이 명료해진다는 것을 느낀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내줄 시간이 이제 없다. 나 자신, 내 일, 친구들에게 집중해야 한다. 더는 매일 밤 <뉴스 아워>를 시청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정치나 지구온난화에 관련된 논쟁에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연이다.”
‘집중’이라는 단어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요즘 옛날에 읽었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의의 책 『몰입의 즐거움』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보면서도 자신의 능력에 좌절감도 느낍니다. 몰입을 하기 위해서는 집중을 해야 하는데도 그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색스는 더는 뉴스도 안 보고, 정치문제에 신경 안 쓰겠다고 합니다. 이걸 보니 조금은 위안이 됩니다. 그도 80이 넘어서 사망 직전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색스에게도 쉽지는 않았던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 천상의 광휘(밤하늘에 가득히 [밀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루처럼 별들이 흩뿌려진’ 것을 보았다)를 보노라니 불현듯 이제 내게 남은 시간과 남은 삶이 별로 없다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 나는 친구 케이트와 앨런에게 말했다. “죽어갈 때 저런 밤하늘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겠군. .. 모든 위로가 지금까지도 대단히 기쁘고 고맙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중 무엇도 별이 총총한 밤하늘만큼 내게 강하게 와 닿은 일은 없었다.”
칸트의 묘에 쓰여진 유명한 묘비명이 있습니다. “내 위에 밤하늘의 빛나는 별과 내 안의 도덕법칙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moral law within me)” 여기서도 별을 얘기합니다. 별은 인간에게 ‘영원’을 상징합니다. 80,90년의 유한한 생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도 누구나 밤하늘의 총총한 별을 향한 향수를 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나도 조금쯤은 돌려주었다. 나는 읽고, 여행하고, 생각하고, 썼다.”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어떠한 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 주고 그것은 마음의 평안으로 연결됩니다. 정말 보통 인간이 보면 감사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한 행복을 누리는 것도 고맙게 여기지 않고 항상 더 많은 ‘복’을 찾아서 허덕입니다. 내려 놓아라, 버려라고 하는 말을 귀에 따갑게 들어도 언제나 저보다 돈을 더 번 동료를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집니다. 자식들도 더 나은 직장에서 돈을 더 받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차를 몰고 아파트 평수도 더 넓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색스의 고마움은 달랐습니다. ‘사랑했고, 사랑받았고, 남들에게 많은 것을 받았고, 조금 돌려주었고, 읽고 썼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의 욕심은 자제하면서 남은 생애 읽고 썼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제 쇠약해지고, 호흡이 가빠지고, 한때 단단했던 근육이 암에 녹아 버린 지금, 나는 갈수록 초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생각이 쏠린다. 자신에 내면에서 평화를 느낀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올리버 색스는 유대인이지만 유대교인도 기독교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초자연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 다시 말해 영원한 천국을 흠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관심은 유한한 인생 가운데서 ‘가치 있는 삶’과 ‘내면의 평화’만이 그가 살아온 존재의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순간을 충실히 살아라는 선(禪)과도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기독교인이지만 이런 생각에 마음이 많이 쏠리는 것이 요즈음의 저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