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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사친을 소개합니다

by wisdom

얼마 전 문자가 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 아들들도 잘 지내지? 참 너희 애들. 우리 직원들이 꼽는 수술 받으러 와서 의젓했던 아이들 중 베스트다."

지난 방학 두 아들들은 내 남사친 경민 오빠에게 포경수술을 받았다.


[남사친]

연애 감정이 있는 남자 친구가 아닌 생물학적인 성(性)만 남성인 친구인, ‘남자 사람 친구’를 줄여서 부르는 신조어이다.


나보다 5살이나 많은 경민 오빠를 친구라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몇십 년 전 우리는 재수학원 같은 반에서 대학입시를 함께 준비했었다.

참! 경민 오빠는 내 첫사랑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오빠는 내 첫사랑 한준 오빠의 절친이었고, 나와 한준 오빠 둘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다가 서로 절친이 되었으니 참 재미있는 인연이다.


오빠는 꽤 괜찮은 대학교를 다니다가 군대에 갔는데 제대 후 복학하지 않고 의대 입시 준비를 하기 위해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스무 살 나에게 스물다섯 살 경민 오빠는 한참 어른 같았다.

오빠는 항상 모의고사 1등이었고 공부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등 아는 것도 참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스물다섯 살 청년이 알면 얼마나 많이 알았을까 웃음이 나온다.

아무튼 그때 경민 오빠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 학생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약 9개월 정도의 시간을 재수학원에서 보낸 후 우리는 입시를 치렀다.

나는 목표로 했던 교대에 가지 못했지만 오빠는 원하는 대로 의대에 합격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잘 버텨 자신의 목표를 이룬 오빠가 너무 대단해 보였다.


재수 시절에는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만사 오케이였을 것만 같았는데 대학 입학을 하니 그 나름대로의 고민이 또 생겼다.

"오빠, 같은 과 선배가 자꾸 연락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나는 그 선배가 별로 맘에 안 드는데... 몇 번 집에 같이 가자고 해서 같이 가고, 연락이 와서 받아준 것뿐인데 내가 잘못한 건가?"

"○○야, 오빠 어린애들이랑 공부하기 너무 힘들다. 여기서도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 무슨 시험은 그리 많은지 매일이 시험의 연속이야. 나는 무슨 팔자라서 맨날 공부만 하고 있는지. 죽을 때까지 공부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졸업을 하긴 하겠지?"

우리는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종종 전화 통화를 하며 때로는 답이 있는 고민을, 때로는 답이 없는 고민을 나누곤 했다.

고작 9개월 함께 했을 뿐인데 힘든 시간을 함께한 이유 때문인지 몇십 년 알고 지낸 친구처럼 허물없고 편했다.


공부가 언제 끝나냐며 투정 부리던 오빠는 6년의 긴 시간을 보내고 의사 국가고시 합격 소식을 전해줬다.

"오빠, 축하해요.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군요. 인간승리네요!”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지를 알기에 마치 내 일처럼 기뻤다.

그 이후 오빠는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전문의가 되었다.

오빠가 개원을 하고 병원을 방문했을 때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오빠의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재수학원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던 오빠를 떠올리면 그 모습이 한없이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진료실에 앉아있는 오빠는 TV에서 항상 보던 의젓한 의사 선생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가 만난 지 햇수로 27년째.

오빠와는 지금도 종종 연락한다.

어느 때는 일주일에 몇 번씩 어느 때는 몇 달에 한 번씩.

살기에 바빠 자주는 못 만나도 일 년에 몇 번은 만나서 밥도 먹는다.

나이가 드니 대화의 주제는 달라졌지만 수다는 여전하다.

"오빠, 우리 신랑이 캠핑 트레일러를 사달라고 하는데 철이 없는 건지 뭔지. 돈 쓸 데가 얼마나 많은데."

"○○야, 너네 신랑처럼 건전한 사람이 어디 있니. 술 마시는데 돈을 쓰니 허튼데 돈을 쓰니. 큰맘 먹고 하나사줘."

나는 오빠의 이 한마디에 몇 달 동안 나를 졸라대던 남편의 부탁을 들어줬다.

"우리 와이프는 왜 그렇게 자주 전화하는지 몰라.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죄다 나한테 물어보고. 바빠 죽겠는데"

"언니는 오빠가 많이 의지되나 보다. 별것도 아닌 것까지 상의하는 거 보면. 기분 좋게 해결해 줘요. 언니는 든든한 남편이 있어서 좋겠네."

때로는 서로 부부 사이에 이해 못 하는 부분을 이해시켜주는 해결사 역할도 해준다.


"○○야, 큰아들 포경수술할 때 됐잖아. 이번 방학 때 하자. 둘째까지 데려와."

오빠의 호출에 지난 방학 아들 둘을 앞세우고 오빠 병원에 갔다.

“오빠~”

“응. 왔어? 꼬맹이들 반가워. 잠시만 기다려줘.”

오빠는 짧은 인사를 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아들들은 엄마가 오빠라고 부르는 의사 선생님이 신기했는지 "엄마 저 선생님은 누군데 엄마가 오빠라고 불러?"라며 궁금해했다.

"엄마랑 같이 공부하던 친구야."

"친구? 오빠라며. 엄마랑 나이가 같아?”

"나이가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어. 쉽지는 않지만"

맞다.

쉽지 않은 관계이다.

5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있지만 남녀 사이에 연애의 감정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게 신기하면서도 감사할 뿐이다.

오히려 애정 관계가 있었다면 지금의 이런 귀한 인연은 없었겠지 싶다.


오빠의 모습에서 27년 전 어린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5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년의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한 가정의 부모로 이 시대의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지애도 진하게 느낀다.

나에게 오빠는 남녀를 떠나서 그냥 멋진 친구이다.

자신이 목표로 한 꿈을 이루고, 인생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

오빠에게도 내가 그런 멋진 친구로 남기를 바라며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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