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17
산타클라라에서 늦게 출발한 덕에 뜨리니닷에는 어두운 밤(그래 봐야 8시경)에 도착했다. 어두워 무섭기도 했지만 또 어떤 숙소가 걸릴지 두려움이 몰려온다. 가로등 불빛은 어두운데 그나마 호객행위 하러 나온 사람들이 있어 덜 한적하다. 서로 자기네 집에 묵어라, 저녁 먹으러 와라, 난리다. 우리는 ‘호텔 라스 꾸에바스라’는 데 예약돼 있다고 하니, “거기 너무 먼데? 택시 타야 해”. 하더니 자기가 택시를 불러주겠다는 아저씨가 있었다(자기 맘대로...). 좀 있다 정말로 나타난 택시. 하지만 기사는 “너넨 사람이 셋이나 된다. 그리고 지금은 밤이고 숙소까지는 너무 멀다”며 10 쿡을 달란다. 시커먼 쿠바의 밤이 무서웠던 우리는 너무 비싸다고 조그만 소리로 쫑알거리면서도 그 택시를 탔다.
....멀긴 멀다(다음날 걸어 내려와 보니 결코 먼 길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골목을 지나고 지나 택시가 산으로 간다? 무슨 숙소가 산에 있냐?
그런데 입구에는 대리석으로 ‘호텔 라스 꾸에바스’ 라고 써놓고 별 세 개를 그려놨다. 산언덕에 무슨 리조트처럼 만들어놓은 곳인데, 으리으리하다. 체크 인 하러 간 카운터의 가격표를 보니 여행사에서 우리가 맡긴 돈을 여기에 다 썼나 보다 싶을 만큼 비싸다. 방 열쇠를 받고 조식이 포함이냐고 내가 물었더니 바로 옆 식당을 가리키면서 영어로 뭐라뭐라 안내를 해준다.
여행지 중 최고였다, 뜨리니닷
“그런데, 우리가 아직 저녁을 못 먹었어요.....(이 근처 어디 저녁 먹을 곳 추천해 주실래요?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여기까지 말하자 카운터의 친절한 그녀는 아까 조식 먹으라 했던 그 식당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저녁 식사도 포함인 건가요?”
하니 '물론'이란다. 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리고 ‘바’는 불포함이라고...(이런 건 다 들린다니까? 내겐 단지 숫자가 잘 안 들릴 뿐) 이게 웬 떡이니.. 깜깜한 산으로 택시가 올라가기에 밥 먹으러 다시 내려가야 하는 건가 걱정했던 게 한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얼른 짐을 던져놓고 식당에 갔다. 메뉴도 푸짐한 데다가 바로 옆 바에서 그 맛있는 ‘부카네로(쿠바 맥주)’ 캔을 잔뜩 사 와서 마시며 저녁을 먹을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다. 그래,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했지만 여행에는 또 이런 맛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여행사에서 3일 만이라도 호사를 누리라고(사실 엄청 좋은 호텔은 아니었음에도 상대적으로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동안 우리를 시련에 들게 했나 보다.
식사를 마치고 바람이 많이 부는 언덕으로 조금 걸어 숙소에 가니 밤하늘에 별이 똬~ㅎ! 우리 딸, 쿠바에 온 보람을 또다시 저 별에서 찾아야겠다. 밤하늘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우리 셋은 모두 몸을 T자로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맑은 공기를 마셨다.
그런데! 어머~ 저긴 불빛도 아름다워~ 라고 생각하며 산 한켠이 훤한 곳을 바라보노라니, 왜 사람들이 몰려서 웅성거리지? 이런! 숙소 바로 뒤 산에서 산불이 난 것이다. 산 하나가 통째로 불길에 휩싸여 있다. 게다가 바람이 장난 아니게 분다. 나무에 둘러싸인 산속 숙소가 무사할까 싶게 거대한, 너무나 가까운 산불...
“엄마, 나 태어나서 산불 처음 봐~!” 하며 황당해하는 딸에게 나는,
“그러니 엄마는 얼마나 황당하겠니? 난 50년 만에 첨 본다.”
그렇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실제로 산불을 본 일이 없다. 평생 그런 경험을 하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한국에서도 못 본 산불을 이렇게 보다니... 하지만 사실은 처음 봐서 신기한 게 문제가 아니고 진심으로 재난의 위협을 코앞에서 느껴보는 일도 처음이었다. 잠든 사이에 산불이 숙소를 덮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만큼 가깝고 거대했던 것이다.
50년 만에 처음 본 산불
2008년 허리케인 강타 때의 쿠바의 사망자는 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재난이 예측되면 실시간으로 방재 방송을 하고 미리 생필품 등을 준비시키며, 재난 발생 시 제일 먼저 임산부와 노약자를 대피시키는 시스템이 잘 돼 있단다. 카리브해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 허리케인이 휩쓸고 가면 비슷한 시기에 쿠바와 미국이 피해를 입는데 피해나 그에 대한 대응은 천양지차다.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 허리케인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에 약탈과 파괴가 횡행할 때 가난한 쿠바는 사망자나 피해 규모도 적었을뿐더러 재난 이후에 오는 절망이나 무질서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다.
그 차이가 무얼까 잠시 생각해 본다. 물론 일단 재난 방재 시스템이 중요하다. 그런데 미국이 과연 그런 시스템이 없는 걸까?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스템을 세워도 무엇을 중심에 놓고 세우는가가 중요하다. 기업의 피해를 어떻게 막을 것이며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가 중심인지, 국민의 목숨과 재산, 이후의 희망을 어떻게 컨트롤할 것인지, 고민의 방향 자체가 다르면 당연히 시스템이 달라진다.
그리고 일단 피해가 발생했다고 치자. 사람들은 당연히 절망할 것이지만 이후에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이 남아있는 가족이든 이웃이든, 마을 공동체이든 말이다. 만약 그것이 국가라면 더더욱 다음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국가가 본질적으로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 아주 깊숙한 논의로 들어가면 좀 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근대사회의 ‘공화국’ 개념에서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걸로 우리는 약속했다. 표면적으로든 어쨌든. 그래서 국가가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함은 대개의 ‘공화국’들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가 아닌 한 국민이 국가의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고 한계인 것이다.
허리케인을 이겨낸 쿠바의 재난 방지 시스템
어차피 인간이 이겨낼 수 없는 자연재해 같은 것 앞에서 완벽하게 우리의 목숨과 재산을 보존할 수 없다 치더라도 국가가 최소한의 보호, 혹은 피해 이후의 대책을 제시할 것이라 믿고 싶다. 쿠바가 엄청난 허리케인의 피해 뒤에도 무질서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국가에 대한 쿠바인들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반론을 제기하는 이도 있었다. 일본의 예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르지 않은가, 하고. 일본에서 2011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법과 약탈이 판치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그것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의 문제보다 ‘문화’의 문제이다, 일본의 경우 마을이나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어서 다른 양상을 보였던 것이라고.
겨우 소방차 한 대
어쨌거나 소문난 쿠바의 재난방지 시스템을 생각해 보면 이런 산불을 나 몰라라 할 리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 조용하기만 하다. 바로 발아래 보이는 마을도 조용하기 그지없다. 어찌 이럴 수가? 숙소가 좀 고급진 곳이라 그런지 관광버스로 온 노인들이 많이 묵고 있었는데 캐나다나 미국 쪽에서 온 듯 보이는 하얀 할머니 한 분이 먼저 내게 말을 건다.
“소방차 한 대 왔대.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뭐? 소방차가 겨우 한 대 왔다고? 근데 뭐가 ‘노 프라블럼’이란 거지? 좀 있다가 아까 우리 짐을 방으로 옮겨주고 팁을 받았던 아저씨도 같은 말을 한다. ‘노 프라블럼’을 몇 번이나 이야기하는데 정말 표정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는 이곳 직원이고 늦은 시간까지 있는 걸 보니 오늘 여기서 자면서 당직 근무를 할 것 같은데도 그리 평안하다. 호텔 당국에서 안심하라거나 대피하라거나 안내도 없다.
깊이 잠든 방에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는 상상을 해본다. 게다가 숙소도 멀리 떨어져서 남편은 혼자 저 끝에, 나와 딸은 이쪽 끝 방에서 자야 한다. 남편에게 방마다 더블 침대가 두 개니 오늘은 같은 방에서 셋이 자자고 했다. 하지만 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왜? 난 혼자 잘 거야.” 한다.
“밤에 갑자기 대피해야 할지도 모르잖아.”
“....”
나는 그런 상황이 되면 나 혼자 딸아이를 구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사실 남편이 태연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계속 밖에 서성이며 산불을 바라보고 서 있던 걸 보면 태연한 것은 우리 딸뿐이었던 것 같다. 딸은 “엄마, 혹시 여기는 이런 일이 흔한 거 아닐까? 어째 사람들이 당황을 안 해?” 한 마디 하고는 먼저 씻고 뻗어 잔다.
개님을 믿고, 산불을 등지고 잠들다
어두운 밤 호텔 마당에 관광차 한 대가 올라왔다. 그 차는 방에서 짐을 다 싸가지고 나온 백인 노인들 한 무리를 싣고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우리도 대피를 해야 하나 걱정이 돼 산불 보다가, 세수 하다가, 남편 방에 갔다가, 새벽까지 왔다리갔다리하는 내게 남편은 결국 평안한 얼굴을 하고는 “괜찮을 거 같아. 이제 당신도 가서 자.” 그런다.
“왜 그렇게 생각해? 불길이 산등성이로 넘어가긴 했지만 저쪽 건물 아래쪽에 활활 타고 있는데?” 그랬더니 “내 방 앞에 강아지 한 마리가 아예 자리를 잡았어.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지. 녀석이 태연한 걸 보면 괜찮을 거 같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딜 가면 유난히 개들이 따르는 풀씨의 방 앞에는 떠돌이 개 한 마리가 토끼풀을 요 삼아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다. 내가 지나가니 살짝 눈을 뜨고 한 번 거들떠볼 뿐 정말 편안하게 잔다. 나는 풀씨의 초능력과 그 강아지의 자연 본능을 믿기로 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산에는 새벽까지 잔불과 연기가 조금 남아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불은 다 꺼졌다. 다시 남편의 분석. 활엽수보다는 야자수 같은 열대나무가 불에 활활 타는 성질은 아니라서 불길이 확 번지고 그러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어쩌면 딸냄 말대로 이런 불이 더러 나더라도 크게 번지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에 소방차도 한 대밖에 안 왔는지도 모르겠다고...
뜨리니닷에 가면 꼭 사야 할 것
무사히 맞이한 뜨리니닷의 아침은 아름다웠다. 산꼭대기라 바람이 많이 불고 조금 쌀쌀하다. 어제 산불이 난 뒷산이 홀랑 타버려 시꺼먼 게 보기 흉했지만 멀리 바라다보이는 바다는 아름답다.
뜨리니닷은 그저 마을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행의 목적을 달성했다 할 수 있다. 첫날은 한 바퀴 마을을 훅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냥 아무 데나 막 찍어대도 달력 그림 혹은 여행사 광고 스틸이 된다. 일단 마요르 광장을 목적지로 하고 자갈이 깔린 길을 걷는데 골목골목에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이룬 수공예품 시장이 보인다. 오직 뜨리니닷에만 있는 것은 직접 만든 뜨게 옷과 식탁보들이다. 솜씨도 대단한데 의자를 내놓고 앉아 아줌마, 아가씨, 할머니들이 한 땀 한 땀 직접 수를 놓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하얀 식탁보를 몇 개 사고 싶었다. 서울에서라면 몇만 원을 줘도 살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저렇게 손으로 직접 만든 식탁보는 아예 구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엄마가 뽀얗게 삶아 유리 밑에 깔아놓던 면 자수 식탁보. 엄마는 장사하느라 새벽 1시나 돼야 집에 돌아오곤 했는데도 늘 그렇게 깨끗한 식탁보를 자주 바꿔 씌웠다. 나는... 식탁보는커녕 유리도 인공 냄새가 나서 치워버리고 식탁의 나무 상판을 그냥 쓴다. 대체로 장식적인 것보다 ‘씸플’한 걸 좋아하는 나이므로 평생 식탁보를 덮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게 참 탐났다.
식탁보는 그렇다 쳐도 내 눈을 사로잡은 면 원피스 하나를 앞에 두고는 그예 발길을 멈췄다. 여행길에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바로 사야 한다. 돌아서서 다른 곳 가서 사려 들면? ‘없~다’. 남편도 나도 숱한 여행길에서 얻은 경험학적 결론이다. 면을 재단한 원피스에 상체 부분은 까만 면사로 코바느질 뜨개를 얹은 원피스는 집에서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만할 것 같다. 15 쿡(15달러)을 부르는 젊은 아주머니에게 내가 영어로 ‘너무 비싸요, 깎아주세요.’라고 말하니 아줌마는 남편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그래, 대화는 그쪽하고 통할 줄을 어찌 아시고...
우리는 결국 필담을 나누어 거래를 성사시켰다. 종이에 15 쿡을 쓴 아줌마와 그 아래 10 쿡을 쓴 풀씨. 아줌마는 그 중간에 12 쿡을 쓴다. 딱 내가 생각한 금액이다. 더 깎을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물건을 살 때 나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 정말 내게 필요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이면 아무리 비싸도 산다. 12 쿡이 많은 돈도 아니고(우리 돈으로 14000원 정도다) 설사 그게 쿠바 물가로 엄청 비싼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나의 적정가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