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16
영어를 못하는 쿠바 사람들과 영어를 경멸하는 한국인 풀씨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여기저기서 연출되었다. 아바나 까사의 할머니와는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사용해 열쇠 사용법까지 배워오더니 택시 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하는 일은 일도 아니게 되었다. 환전소에서 환전하는 일은 오롯이 풀씨 몫이었는데 심지어 “전부 이렇게 큰돈으로 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작은 돈으로 달랬더니 없대.” 이런 대화까지... “그걸 어떻게 알아들었어?” 그러면? “뭐, 그냥???” 이런다. 아는 스페인어는 ‘올라(안녕)’밖에 없으면서...
스페인어 없이 쿠바인과 소통하기
뜨리니닷 마요르 광장에 있는 작은 박물관들을 돌아보다가 제일 보고 싶어 했던 ‘건축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문이 잠겨있고 안에 웬 할아버지 한 분이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오늘 왜 안 열었나요? 아, 내일 연다고요? 내일 몇 시에 여나요?”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데 중간에 내가 아는 스페인어 단어 좀 써 보려고
“ ¿Mañana por la mañana?(나는 내일 아침에요?) ”
“¿Que hora?(몇 시에요?)”
이렇게 말해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내게가 아닌 한국말 쓰는 풀씨에게 손가락을 써가며 설명해 준다. 풀씨 왈,
“내일 아침 9시에 연대.”
이런...게임 클리어.... 왜 난 못 알아들었는데 당신은 알아듣는 거냐고~?
이 사람은 외계인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영어든 스페인어든 늘 공부를 열심히 하는 쪽은 나이지만 정작 성공률이 낮아 남편에게 ‘평소에 영어공부는 왜 그리 열심히 했는데? 10년 공부해도 별 보람이 없구만.’ 이런 핀잔을 듣곤 했다.
물론 이 말은 틀렸다. 영어 대화 성공률이 풀씨가 30%라면 나는 70% 정도 된다. 못 알아듣거나 전달하지 못하는 30%는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으나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주 유창하지 않은 외국어 독학자라면 누구라도 90% 이상 원활한 의사소통은 어렵지 않을까? 내가 공부하는 양에 비해 소득이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풀씨의 오십보와 나의 백보(거꾸로인가? 하여간..)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쨌든 이 여행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나의 영어는 나름대로 유용했음을 풀씨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뭔가를 물어 1시간 안에 해결하느니 지도를 보고 세 시간 헤매는 길을 택하던 풀씨가 여행 중반이 넘어가자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한다. 호텔 카운터에 뭘 요청하러 가기도 하고 그런다. 어이된 일인가?
영어 덤앤더머 부부
나의 영어를 비웃으면서도 그는 내가 가령 전구가 나갔다고, 비밀 금고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내일 아침 비아술 가야 하니 택시 예약해 달라고 호텔 카운터에 다녀오면
“뭐라고 말했어?” 하고 꼭 물어본다.
그래서 내가 써 본 영어 표현을 블라블라... (어차피 틀려도 다들 틀린 줄도 모르니까 신나게 블라블라~) 하면,
“오~ 대단한데~? 난 블라블라~ 이렇게 문장을 생각했는데”
이러면서 또 영어 덤앤더머부부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나의 영어의 가장 큰 문제는 ‘듣기’가 잘 안 된다는 점이다. 문장도 입에서 늦게 나오고 완벽하지 않지만 저쪽에서 알아는 듣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그쪽에서 답해주는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특히 숫자가 나오면. 그래서 꼭 딸을 대동하고 갔다. 내가 영어로 말하고 직원이 영어로 말하면 그다음에 내가 다시 딸에게 “뭐래니?” 하고 묻고 딸은 “조식은 7시 반부터, 식당은 10층. 텐th 플로어래잖아. 그게 안 들려?”
이런 식이다.
.....안 들린다. 숫자가 안 들린다고~!!. 무슨 요일 이런 것도 잘 안 들린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했다.
“엄만 왜 안 들릴까? 넌 어째 그렇게 듣는 걸 잘하니?”
그랬더니 딸이 자기는 고3 때 영어듣기 평가 문제를 하도 많이 들어서 숫자가 잘 들린단다. 그러면서 결국 내게 <마더텅 수능 영어듣기> 문제집을 사주었다(나중에 한 권 다 풀었다. .... 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반면 그녀는 자신이 문장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문법 공부가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는지, 돌아오자마자 고등학교 때 본 문법책을 다시 한번 훑어본다. 시차 때문에 초저녁에 자고 새벽 3시만 되면 온 가족이 일어나 유령처럼 돌아다니곤 했는데 딸아이 방에 불이 켜져 있어서 들여다보면 영어 문법공부를 하고 있다. 영어 문법 무용론을 펼치는 남편은 “쟤는 왜 쓸데없이 문법을 본댜?” 이러지만 나는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가 가장 달고 재미나다’ 는 입장이라서 냅두라고 한다.
언어는 논리가 아니다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오자. 해외여행 나가서 외국어가 부족해 일어나는 에피소드야 그렇다 치고, 또 돌아와서 “영어공부 좀 해야겠어.” 하고 잠시 영어책 좀 들여다보고 하는 것도 남들 다 하는 일이라 치고, 사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진지하게 ‘언어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여태껏 나는 영어는 ‘로직’, 즉 논리적 체계라고만 생각했던 게 아니었나 반성하게 되었다.
풀씨의 소통 방법은 우직하고 단순하다. 그가 개들과 대화를 하는 방식이나 쿠바 사람들과 대화하는 방식, 심지어 한국인과 대화를 하는 방식 모두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내가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이 통했어? 어떻게 알아들었어?”
“그냥..”
“아니, 그러지 말고 방법을 말해줘 봐봐.. 이건 공부를 해서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아. 문장을 제대로 만들어서 공부를 해서 대화를 하는 나와 그런 과정이 없이도 대화를 하는 당신이나 소통에 별 차이가 없는 이 비밀을.. 그게 뭐냐구.”
“음... 일단 그 사람 눈을 바라봐..”
“그리고?”
“그러고 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그게 다였다. 물론 긴 말, 현학적인 표현과 깔때기(자화자찬)에 있어 몹시도 무능한 그라서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내 식으로 저 말에 주저리주저리 주석을 달아보자면, 눈을 바라보고 마음에 진정성을 담아(나는 ‘간절히’ 택시를 타고 중앙공원까지 가고 싶으며, 10쿡은 너무 비싸므로 깎아주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이런 식으로 ^^) 한국말로 말하면 저쪽에서 다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쪽이 하는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방식도 같다. 그 사람 말을 들을 때는 눈을 바라보고...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겠지?
나도 꽤나 감성적이고 직관이 발달한 편이라고 자처하는 바이지만 풀씨와 그의 아들에 비하면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를 지녔다. 딸도 이쪽에 가깝다. 여자와 남자의 문제가 아님은 지난번에 밝힌 바 있다. 분명 의사소통에 있어서 나는 지나칠 정도로 논리적 구조를 중시하는 사람이고 남편은 지나칠 정도로 감성언어가 발달한 사람인 것 같다.
시는 논리가 아니라던 그 신비스러운 청년
대학 2학년, 한참 연애할 때의 일이다.
남편이 당시에 쓴 시를 한 편 보여주었다.
내가 시어 하나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뜻으로 여기에 썼어?” 라고 물었다.
그는 “시어는 그렇게 논리적으로 ‘해석’이 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았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런데 그가 말하면 다 진짜 같다. 그래, 정말 그렇다. 시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건 수험용으로 공부할 때나 하는 짓이다. 그래도 시집을 사면 꼭 뒤에 있는 평론가의 주절주절한 문장을 재미나게 읽는 나로서는 그의 말에 뭔가 반발, 아니, 반박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는 시를 쓰고, 나는 시를 쓰지 않았으므로 스물두 살 청년시인을 존중해 가만히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도 시를 읽을 때 조심스러워진다. 행여 그 ‘해석되지 않는’ 시의 영역을 훼손할까 봐.
영성언어 외계어 외국어의 꿀팁은
무엇이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와 나 사이에 좀 더 정교하면서도 신비로운 언어와 의사소통의 법칙과 방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둘 다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 것은 아니므로 둘 다 ‘옳다’ 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의 방식에 감탄한다고 해도 그걸 따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어의 본질이 문법이나 표현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번 여행에 다시 한번 깨달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은 ‘말의 정보’가 전부는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눈빛과 마음빛이다. 어떨 땐 그 감성문법이 심지어 정보까지도 제공해 준다는 것. 그걸 풀씨에게 배웠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땐 내 남편이 ‘영성언어’를 가지고 있나 싶어 우러러보이다가도 돌아올 때 공항에서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에잇, 영어공부를 좀 해야지, 이거 외국만 나오면 바보가 된 것 같아서, 원...” 이렇게 말할 때 보면 그냥 영락없이 영어 못하는 한국아저씨다. 그래, 공부를 하자구, 공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