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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Aug 18. 2024

쿠바 멍멍이와 대화를 나누던 그 남자

오래전 쿠바 여행 15

     

사람들은 언어를 흔히 논리의 체계로 인식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살면서 누구나 많이 경험할 것이다. 흔히 하는 말, 외국 가서는 영어보다도 ‘바디 랭귀지(아, 이 글에서 사용하는 외국어 표기는 한글 어문규범상의 외래어 표기법을 지키지 않고 있음을 밝힙니다. 글쓴이가 혀가 가는 대로 발음하고 있구나! 이렇게 여기시면 될 듯합니다. 가령 '트리나다드'가 외래어 표기법 상 맞는 표현이나 저는 현지인들 발음에 가깝게 '뜨리니닷'이라 적곤 합니다)’가 최고다, 하는 말도 일종에 그런 것이리라.     


세상을 만나는 또 하나의 통로외국어 습득

그런데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심각하게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외국어를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일이다. 영어에 정신적으로 식민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없지 않지만, 사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통로로써 외국어는 정말 유용하지 않은가. 그러나 어째 어학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는 건지(어학에 소질이 있다, 없다 논쟁은 유효하다. 어학 습득도 '능력'이 분명 작용한다) 공부를 하는 분량에 실력이 비례하지 않는다.      


영어는 그렇다 치고 이번 여행에는 스페인어를 좀 공부해 보았다. 정말 재미있었다. 동기도 있고 목적이 분명하니 진도도 잘 나가고 재미도 있다. 일단, 좋아하는 노래 <돈 데 보이 Don de voy>(나는 어디로 가나?)를 익히기 시작했다. 단어도 찾아가며 하루에 스무 번씩 노래를 듣고... 그리고 가서 써먹을 여행용 회화도 공부해 본다. 5년 전 스페인에 갈 때 한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영 진전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숫자까지도 외워갈 수 있었다. 가서 써먹을 표현을 수첩에 잘 정리하기까지 했다.      

뜨리니닷 동네 골목길

스페인어 공부 좀 하잤더니

“자, 이리 와 봐. 인사 정도는 배우고 가야지. 안녕하세요는 ‘올라~!’, 고맙습니다는 ‘그라시아스~!’, 그리고 이거 중요해, ‘디스꿀뻬’랑 ‘뽀르 빠보르’. 실례합니다야, 이게. 영어로 익스큐즈 미, 플리즈랑 같지.” 

혼자 열심히 떠들자 딸이 시큰둥하게

“근데 왜,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관광객들은 한국어 공부 안 해오는데 우린 스페인어를 공부해 가야 해?”

“안 해오는 사람들이 이상한 거지. 인사말 정도는 공부해 가는 게 예의지. 자, 따라 해, 부에노스 디아스~ 이거 아침인사고...”     


“화장실 어디예요? 는 ‘돈데 에스따 엘 바뇨?’야. 바뇨가 화장실이래.”

공부도 할 겸, 좀 주워듣기라도 하라고 잘 자리에서 혼자 스페인어 강의를 하면 남편은 뚱하니 듣다가 이런다.

“그런데, 우리가 스페인어로 물어봤다 쳐.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대답을 할 거 아냐. 그거 알아들을 수 있어?”

“... 못.. 알아듣지...?”

“그런데 어차피 완벽하지도 않을 거 스페인어 공부 좀 해가는 게 뭔 소용이야?”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 그런다고 공부하는 데 찬물을 끼얹어?!

이 사람은 내가 영어 공부를 해도 그런다.

“발음이 뭐 그리 중요해? 또박또박 말하면 돼.” 

뭐 그런다고 일부러 ‘아이 캔트 고우 투 데어’ 이렇게 할 필요까지야... 발음을 너~무 안 굴린다고, R 발음은 어디 간 게냐고 놀리면 “영국식 발음이야~!” 항변하던 풀씨였다. 

    

스페인어 덤 앤 더머 부부

그렇게 그는 내게 별 쓸데없는 공부를 한다고 면박은 주었지만 막상 쿠바에 가서 택시를 타거나 할 때

“디에스? 그게 뭐야?”

하고 묻는다.

“거봐, 숫자 공부 하자니까. 디에스는 10이야. 10 쿡 달래. 너무 비싸다. 뽀르 빠보르, 꼬르떼(깎아주세요)!” 

그러자 택시 기사가 

“세이스” 그런다. 남편은 또 내 얼굴을 쳐다본다.

“세이스가 6이라고 그랬나?”

“응, 6이야. 6 쿡 좋다. 간다고 해.”

이렇게 숫자가 유용했다니까? 물론 내가 매번 이렇게 알아들을 건 아니다. 오히려 

“저 아저씨가 뭐랬어?”

“꽈뜨로”

“아, 그럼 4다.”


아, 나는 가는귀가 먹어서 그런가(이건 자학개그가 아니다. 나는 어려서 중이염을 심하게 앓아 왼쪽 귀 청력이 50% 정도 손상되어서 실제로 한국말도 왼쪽에서 말하면 잘 못 듣는다. 물론 그게 외국어 알아듣는 거랑은 다르겠지만... ), 왜 이렇게 못 알아듣지? 

그런데 풀씨는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알아듣는 귀가 정확하다. 


이 사연을 알아보기 전 내 아들 이야기를 해보련다. 풀씨와 의사소통 방법이 매우 유사하므로.  풀씨에게 큰 키와 살짝 올라간 눈꼬리와 감성을 물려받은 울아들(지금은 어른이다)이 초등학교 때 이야기이다.

아바나 공터에가 강아지 파는 아저씨

개와 대화를 나누던 풀씨 아들

우리 동네에는 온몸이(아니, 온털이) 까만 개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목줄을 묶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들이 꽤 있었다. 물론 15년도 더 전의 일이니 그 개님은 이미 한참 전에 돌아가셨을 터이다. 


하여간, 외모는 검둥사자처럼 좀 거칠게 생겼으나 동네 사람들에게 ‘후까시’ 잡는 일 없이 낯익은 이웃아저씨 같이 친근하게 느껴지던 검둥개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 보니 저 앞에 우리 아들이 걸어가고 있는 게 보인다. 큰 소리로 부르면 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으나 이제 막 사춘기에 진입하는 초 고학년 아들을 뭘 소리쳐 부르기까지 하나, 저는 저 갈길 가고 나는 내 갈길 가는 게지..      

그러는데, 가만 보니 아들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옆에는 바로 그 검둥 ‘개아저씨’가 나란히 걷고 있는 거였다. 아버지를 닮아 유난히 개들이 따르는('개를 좋아하는', 이 아니다. 물론 개를 좋아하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이 부자는 개들‘에게’ 인기가 엄청 좋다.) 아이였다. 그런 줄은 알고 있지만 뭐 그런다고 개랑 대화를 나누기까지...? 그렇게 나란히 한 100미터쯤 대화를 나누며 걷다가 아마 갈래길에 이르렀나 보다. 아들은 손을 들어 검둥개에게 ‘빠이빠이’를 한다. 그 ‘씨크검둥개아저씨’는 (아마도 사람 나이로 환산하면 아들보다 형님이나 삼촌뻘 정도 되었으리라) ‘오냐~’ 하는 표정으로 아들을 일별하고 제갈길 가셨다.   

   

집에 와서 물었다. 

“너 아까 까만 개랑 뭐라 뭐라 하며 한참 걷더라? 무슨 말 했어?”

“뭐 그냥, 너 어디 가? 이런 거?”

“그랬더니 뭐래?(내가 미쳤나, 이런 걸 왜 물어...--)”

“개가 뭐 대답을 해? 나 혼자 물어본 거지.”

“...(그러면 그렇지) 그렇겠지... 그래도 너 안녕! 하고 걔랑 헤어지던데?”

“응, 내가 손 흔드니까 그 개도 나한테 눈으로 안녕하고 갔어.”   

  

지난겨울에도 어느 절에 혼자 가서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갔는데, 절 입구에서 개 한 마리가 자기를 20분간 졸졸 쫓아오더란다. 마치 ‘이 동네 처음이지? 내가 절까지 데려다 주마.’하는 것 같더라나. 그리고는 절 입구에서 자기를 한참 쳐다보다가 제갈길 갔단다.

뭐... 과학적으로는 얘한테 얻어먹을 거 없나? 날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걸 보니 과자라도 줄지 몰라... 하고 졸졸 쫓아오다가 에이, 짜식 먹을 것도 안 주고... 가라, 인마... 이랬을지도...

하지만 감성 만땅인 울아들은 왠지 절 앞에서 신비체험이라도 한 듯

“나한테 길안내를 한 거야. 참 신기하지, 그치?”

라고 말했고 안 그래도 아들의 존재 자체에 신비를 느끼는 이 에미는

“개들이 영성이 있대거든, 네가 절에 가는 줄 알아봤던 게다, 그 개가..”

이런, 남들이 들으면 ‘뭔 또라이같은 소리야?’ 했을지 모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스페인 개와 대화를 나누는 풀씨

이 ‘개역사’라면 풀씨가 남부럽지 않다. 어딜 가면 그렇게 개들이 따라 온다. 아바나에서도 그랬다. 배고픈 개가 졸졸 쫓아오자(그 녀석은 명백히 먹을 것 좀 달라고 따라 왔었다. 너네 이 동네 처음이지? 냄새가 다른데.. 근데 나 뭣좀 주라, 이런 몸짓이었다) 줄 게 없던 우리는 ‘모른척하기작전’으로 대했다. 나는 큰 개를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 평소에 개들에게 인기가 많은 남편을 탓했다. 당신 어디만 가면 개들이 따라 오잖아~! 


평소에는 개들에게 그토록 다정하던 풀씨도 공항노숙의 피로가 안 풀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꾸 치근덕대는 개가 좀 귀찮았는지 결국 목소리를 쫙 깔고 다정하면서도 카리스마 있게 “가~, 이제 가, 임마~. 줄 게 없어.” 하고 말하자 그때서야 제 길을 가는 것이었다. 내가 가랄 땐 꿈쩍도 않더니! 풀씨 말은 들어? 이런 개새...

그러니까 결론은, 풀씨와 그의 아들은 개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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