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14
사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체 게바라보다 피델 카스트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흔히 사람들은 체 게바라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낭만적 혁명가, 감성적이고 따뜻한 인간적 지도자라 생각해서 거리낌 없이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 피델 카스트로를 좋아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선언하기도 전에 죽어버리지도 않았고 1960년에 명백히 공산주의자임을 선언한 피델,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세계적으로 장수독재를 한 인물인 피델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반공이 국시인 줄 착각하는 대한민국이서는 참 위험천만한 일이다.
피델이라는 사람
그런데 놀라운 건, 52년(2016년 당시) 독재를 했다는 피델의 우상화 흔적은 쿠바 어디서도 별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 내가 가장 놀랐던 것은 일단 그것이다. 12일의 쿠바 여정에서 길거리에서 피델의 얼굴 그림이나 이름을 본 것은 세 번도 안 된다.
내가 본 그 세 번의 피델 얼굴 혹은 이름 중엔 이런 것이 있었다. 'Con fiDel Revolcion’(피델과 함께 혁명을)'. 쿠바의 가장 큰 주민 자치조직이라 할 수 있는 CDR(Comite de Defensa de la Revolucion)은 원래 혁명방위위원회를 뜻한다. 말하자면 약자를 가지고 재미있게 표현한 것일 수 있는데 이 정도가 내가 본 피델을 기리는 ‘구호’ 정도였다. 쿠바 사람들은 왜 피델을 우상화하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어 본다. 그리고 그 답이 바로 쿠바의 공산주의가 다른 나라 공산주의 정권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고 본다. 쿠바에는 살아있는 지도자를 추앙하지 못하게 하는 법이 있다 한다.
읽은 책들(<쿠바 혁명사>, <쿠바의 민주주의>, <쿠바식으로 산다>, <교육 천국 쿠바>) 중에는 곳곳에 피델의 연설들이 등장한다. 피델은 유명한 선동가였다고 듣긴 했지만 이토록 달변인 줄은 몰랐다. 피델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에는 이런 게 있다.
역사가 무죄로 하리라
바티스타 집권기인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한 MSR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그중 피델 카스트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체포 된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 출신(아바나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이었기 때문에 자체 변호를 했다고 한다.
... 너희들이 내 심장에 총구멍을 낸다 하더라도 조국, 정의로움, 인류에 대한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들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단을 쓸 것이지만, 나는 꼭 너희들의 더러운 역사를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알릴 것이다. 너희들이 날 방해하고 이 비좁은 공간에 가둘수록 내 혁명적 마음을 더 살아날 것이며, 너희들이 나를 침묵시키려 노력할수록 쿠바 인민들의 혁명적 동기는 더욱더 타오를 것이다. 또한 너희들이 수작을 해서 나와 전 대원들의 숭고한 정신을 왜곡시켜 내가 당장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도 아니며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우리가 많이 인용한 유명한 말들 중에 피델이나 체가 했던 말들이 많다. 체의 명언은 그가 ‘죽어서’ 더욱 빛나고 피델의 명언은 ‘성공한 혁명’이어서 더욱 빛난다. 비애의 역사 속에, 실패한 혁명 속에 스러져 간 많은 ‘우리 혁명가’들의 절창은 언제 다시 빛날 것인가.
지고도 빛나는 것이 별뿐이랴
아바나와 뜨리니닷의 놀랍도록 빛나는 별빛을 보면서 딸은 ‘엄마, 저 별빛이 지금 것이 아니라며? 그런 생각하면 기분이 진짜 이상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래, 때로는 이미 죽은 별이 마지막 발한 빛을 우리가 수백, 수천 년 후인 지금에 보기도 한다더라. 먼 하늘을 보면 시공이 뒤섞이는 것 같은 묘한 감상에, 내 작은 존재가 정말 우주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시간 속에 공간 속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또 다른 존재감, 그런 느낌 때문에 시인들은 별을 자꾸 바라보았겠지.
최근에 ‘역사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많이 생각한다. 나는 죽어도 역사는 남는 것, 지금이 아닌 또 다른 시대가 가슴속에 살아 있는 것, 그런 상념 속에 나의 나이 듦, 한 인생이 죽음 앞에 놓임, 이런 것들이 무의미해지기도 한다. 체와 피델은 죽은 혁명가, 살아남은 혁명가의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많은 이들의 인생에 또 쿠바의 역사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서 또 많은 화두를 던져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