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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Aug 10. 2024

이 작은 전차로 혁명의 한방을

오래전 쿠바 여행 13


점심 후 일단 체 게바라 박물관부터 갔다. 그날이 월요일이어서 박물관은 휴장이다. 다만 야외 기념탑을 볼 수 있다. 구름 낀 하늘을 올려다보니 체 게바라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총을 들고 있지만 주먹을 쳐들고 있지도 않고 손을 뻗어 어디를 가리키지도 않고 있다. 그 자세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은데도 묘하게 카리스마가 있다.      

체 게바라의 위상은 전투력만으로도 카리스마가 넘치지만 늘 미소를 띠고 있어서 그런지, 시적 감수성 때문에 그런지 그의 친화력 때문인지 몰라도 ‘따뜻한 카리스마’이다. 큰 소리 내지 않고도 사람을 따르게 하는 신비한 능력은 ‘진정성’에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머리로 다 안다. 갖고 싶은 것 중 하나이다, 그 ‘따스한 카리스마’라는 것. 체 게바라를 부러워하는 건 아니다. 그냥 조촐한 우리 삶에서 그런 게 만약 필요하다면 갖고 싶다는 것이다.      


부럽다따뜻한 카리스마

체 게바라의 유해가 있는 기념관은 내일 봐야 한다. 그러려고 내일 일정도 산타클라라에서 느지막이 이동하게끔 짜놓았다. 오늘의 다음 방문지는 ‘장갑열차 기념관’이다. 어젯밤 우리는 침대에 엎드려 장갑열차 기념관에 대해 읽었다. 폰으로 테트리스를 한참 즐기던 딸은 내가 읽어주는 책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1958년 12월 19일, 24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체 게바라는 불도저 하나로 선로를 엎어 무기를 싣고 지나가는 정부군(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차들을 탈선시켰다, 이거야. 탈선한 기차는 전복되고 그 안에 타고 있던 300명의 정부군은... 모두 혁명군에게 투항했대. 혁명군은 무기도 전부 탈취하고. 그리고 이 전투는 결국 쿠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 결정적 한방이 됐다는 거지. 이봐, 여기 이 노란 불도저가 그거래, 우리 내일 이거 보러 가.”

쿠바 혁명에 기여한 불도저는 너무 작고 귀여웠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드라마틱해서 그런 걸까? 딸냄은 졸려서 하품을 하는 내게, 산타클라라나 체 게바라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를 더 해보라 한다. 어렸을 때 잠자리에서 재미난 그림책을 읽어주면 오히려 말똥말똥해져서 더 읽어달라고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녀석은 어려서부터 ‘이야기’를 즐긴다.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갔을 때 하루 온종일 대충 봐도 다 못 본다는 그 많은 작품들을 얼른얼른 볼 생각은 안 하고 그림마다에 멈춰 서서 “엄마, 이 그림은 무슨 장면이야?”를 묻곤 했다. 대개는 성서 속의 이야기 혹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인 경우가 많은 그림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설명이 아닌 서사적 서술을 해줘야 만족해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곤 했다. 우리는 몇 작품 못 보면서 오전 내내 오래오래 느긋하게 프라도 미술관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딸이 선택한 길

나의 큰아이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려서 결국 디자인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오빠의 그림 솜씨에 눌려 자기는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한 딸아이는 대신 스케치북에 미주알고주알 이야기가 있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었다. 그걸 두고 아이 아빠는 자신의 어릴 적 꿈이 ‘만화가’였다면서 딸냄에게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그려 봄이 어떻겠냐고 권하곤 했다. 


나는 프라도 미술관에서 둘째 아이가 소위 말하는 ‘스토리텔링’에 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미술관을 거닐면서 “너는 이다음에 큐레이터 같은 거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아직 중학생이던 딸이 큐레이터에 관심을 가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물론 나중에 대학 갈 때 녀석이 간절히 그걸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길, 흥미 있는 길의 가닥을 잡을 때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었던 여러 갈래 길 중 하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결국 딸은 여행 가기 직전 해에 ‘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이제 갓 대학교 1학년을 지나왔는데 벌써부터 ‘문과생 취업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녀석이 안쓰럽긴 하지만 어쨌거나 자기가 공부하는 과의 독특함에 대한 자부심은 있는 것 같다. 아빠가 자신의 어렸을 때 꿈을 말했듯이, 고백하건대 미술사학은 내가 국문학을 하지 않았다면 하고 싶었던 공부이다. 집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 육아와 살림에 지쳐 늘 잠이 부족하던 때, 나의 간절한 소망은 학교 업무와도 관계없이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를 공부해 보는 것이었다. 둘째가 아직은 등에 업히곤 했던 작은 꼬마였을 때 어느 겨울, 옆에 아기를 재워놓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두 권에 연필로 밑줄을 치며 읽다가 같이 잠들던 일이 행복하게 기억에 남는다.     


자식은 결코 부모의 욕망을 투사하는 존재여서는 아니 된다. 그러나 부모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은 가족의 가치관이 되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지 않아도, 밥벌이가 되지 않아도, 소박한 것이어도, 예술이 늘 삶에 함께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이것은 우리 두 사람 모두의 소망이었던 것 같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삶, 그리고 무엇보다도 멋지게 사는 것,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사는 것, 그런 가치관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졌다고 생각한다.     


장갑열차 기념관

쿠바에 간 한국인들은 무엇을 기대하고 그곳에 가는 걸까? 그 먼 곳에 굳이 갈 정도라면 그냥 즐기러만 가는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많은 관광객들은 그냥 ‘신기한 곳’, ‘휴양지’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쿠바 여행 블로그 중에는 이 장갑열차 기념관에 대해 ‘별로 볼 게 없다고 해서 '패쓰'했다’는 사람도 있고 ‘가보니 쬐끄만 불도저에 페인트칠해 놓고 1 쿡(쿡은 쿠바 페소이다. 2016년 당시 1쿡은 1달러 정도였다)이나 받는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 기찻길 옆 동네 공터에 불도저 한 대(그나마 이게 너무 작아서 깜짝 놀라웠던 이유는 시시하다기보다 ‘저렇게 작은 불도저로 선로를 갈아엎었단 말인가?’ 싶어서 그랬다.), 그리고 당시에 선로를 이탈한 기차 4량이 어수선하게(아마도 당시의 이탈한 모습을 재현한 것이리라) 놓여 있다. 그 안에는 당시 전투의 흔적들, 즉 사진, 당시의 군복이나 무기 등등이 있다.     

전차 박물관을 견학하는 쿠바 초등학생들

둘러보는데 얼마 걸리지 않지만 나와 보니 바로 앞에 기찻길이 있다. 말하자면 현장에 그대로 기념관을 만든 것이다. 풀씨는 내내, 광주 도청에서 역사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는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이것은 이후의 권력이 성공한 권력인가 아닌가의 문제일까? 전두환뿐 아니라 이후에 민간 정부도 광주의 역사를 제대로 간직하고 물려주려 하기보다는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았나, 돌아보면 안타까움이 남는다. 광주뿐이랴. 하다못해 치욕의 역사라도 유물로 남겨야 했다는 게 나의 입장이다.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기념을 지니고 싶다

흔적을 지우는 것은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부끄러워도 끝까지 안고 가야 하는 기억도 있고 가슴 아파도 더더욱 해마다 돋워 올려야 하는 기억도 있다. 자랑스러운 기억이랄 것도 별로 없지만 왜곡하고 윤색하고 덮어버리고 지워버리는 역사의 조작질을 하도 많이 봐 와서, 비록 박제여도 좋으니 좀 제대로 남겨놓은 역사를 가져보고 싶다.     


이런 생각은 다음 날 다시 한번 이곳에 왔을 때 또 하게 된 것이, 마침 주변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줄을 맞춰 이곳에 견학 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 학생들에게 이곳은 자주 들르는 놀이터 같은 곳이다. 방과 후 수업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택가 바로 옆에 놓인 기념관에 들렀다가 하교를 하는 것 같다. 혁명사는 책에서만 배우는 게 아니었던 거다. 쿠바의 교과 내용을 보면 중학교에서 역사를 두 과목이나 배운다. 하나는 쿠바 전체 역사이고 하나는 혁명사이다. 일종의 근대사로써.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원래는 폴란드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에 적혀 있는 말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이라고 한다. 역사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는 경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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