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6
2016년 1월, 쿠바는 내내 구름이 많았다. 그렇다고 맑은 하늘을 못 본 건 아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없을 뿐,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정말 파랗다. 게다가 그 많은 별들... 나로서는 어렸을 때, 혹은 강원도에 근무할 때 보았던 별이지만 이제 갓 스물이 된 딸냄은 거의 전생애 중 가장 많은 별들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쿠바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것은? - 별빛
아바나 까사에서 세 밤을 자고 1월 17일 새벽에 시외버스(비아술)를 타고 ‘바라데로’라는 바닷가 휴양지로 떠나야 했다. 여행사가 우리에게 준 버스 시간표는 아침 6시. 표가 별로 없어 선택의 여지도 없다고 한다. 30분 전에 도착해 예약증을 주고 티켓을 출력한 후 짐을 부치란다. 그러니 새벽 5시에는 집을 나서야 한다. 몸만 나서나? 세 개의 트렁크를 끌고 나가야 하니, 게다가 아침도 걸러야 하니 이런 멍멍이 고생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잠을 안 자다시피 하고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트렁크 셋 중 하나에는 즉석밥과 컵라면, 김치, 꿀호떡, 초콜릿, 소시지, 참치, 고추장, 캔 햄...까지 식량이 가득했다. 언제나 해외여행 갈 때 이렇게 식량을 싸가서는 다 먹고 그 자리에 현지 술과 각종 선물을 담아오는 전략을 취한다) 짐을 싸고 씻고...
너무 부지런을 떨었더니 한 시간이나 남았다. 새벽 4시, 발코니 문을 살며시 여니 밤인데도 별로 춥지는 않고 비 온 뒤의 습기 어린 공기가 들어온다. 아직 캄캄한 새벽에 나무와 꽃이 가득한 발코니에 섰다가 꺄~! 소리를 질렀다. 별이... 세상에 그리도 맑다니. 작은 발코니에서 하늘을 넓게 못 봤을 뿐이지, 딸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맑고 진한 별빛에 놀란다. 나는 아예 의자를 꺼내 앉아 눕다시피 고개를 눕히고서 한참 별을 바라보다 들어왔다.
쿠바 개(犬)들의 생활태도
그런 별은 뜨리니닷에 가서도 볼 수 있었다. 쿠바가 낡은 차에 경유를 주로 동력으로 쓰는 곳이다 보니 매연냄새가 많이 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차가 많지 않아 하늘이 정말 맑다. 공기도 깨끗하다. 술을 마셔도 머리가 맑고 하루 종일 거리를 쏘다녀도 목이 아프거나 코가 답답하지 않다. 한눈에 들어오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딸은 “지구가 정말 둥글긴 하구나.”라고 말했다. 괴기스러울 만큼 싱싱하게 잘 자란 열대의 나무들, 늘씬한 야자수가 도심과 공원 곳곳에 있지, 황금사철나무라고 하는 것들이 길가에 무럭무럭 자라고...
자연과 어우러진다는 것을 별, 하늘, 나무들, 집집마다 키워대는 화분 속 식물들, 폐허에서도 시퍼렇게 무성히 자라나는 우듬지에서만 느낀 건 아니다. 곳곳에 개들이 참 많다. 아무래도 떠도는 녀석들인 것 같은데 한 번도 개들이 위협적으로 느껴진 적이 없다. 사람들을 닮아 개들도 순한가, 싶기도 하고 먹을 게 별로 없어서 기운이 없어 그런가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야말로 사람과 개가 어우러져 사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활태도’가 (개들) 몸에 배인 것인지도..(에이, 설마... 웃자고 하는 소리올시다.) 공항 식당에 둥지를 틀고 사는 새들이며 비싼 호텔 식당에 들어와 빵 한 조각만 주라옹~ 하고 귀염을 떠는 고양이까지, 여기 사람들은 풀이고 나무고 개고 새고 고양이고 그냥 늘 거기 있는 존재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깔끔한 쿠바뇨, 멋쟁이 쿠바나들
쿠바가 지저분하지 않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사실은... 길에 개똥이 너무 많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깔끔해서인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참 깨끗하다. 이 ‘신기하게도’라는 말에는 무슨 편견이 묻어있는 걸 수도 있다.
더운 나라다. 게다가 가난한 나라이지 않은가. 호텔에 더운물도 잘 나오지 않는, 비누나 샴푸 따위가 귀한 나라라지 않나.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 ‘낯선 이방인의 냄새’를 느끼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택시를 타도 경유 냄새가 날지언정 기사의 몸에서 냄새가 난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택시 시트의 냄새, 담배 냄새, 기사분들에게서 나는 ‘아저씨 냄새’ 때문에 택시타기를 꺼리던, 냄새에 몹시 예민한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좁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못 맡아본 음식냄새 따위를 느낀 적이 없다고 우리 셋은 모두 신기해했다. 오히려 여기 사람들은 멋 내는 걸 좋아해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더 많았다. 특이한 비누 냄새가 나는 사람도 많았고 여자들은 거의 대부분, 할머니나 호텔 청소하는 분들, 여중생들까지도 다 네일 아트를 하고 다녔다. 내 기억에 손톱에 뭘 꾸미지 않았던 이는 마지막 호텔 카운터에 앉아 있던 아줌마 한 사람 정도였던 것 같다.
‘식당 찾기’가 여행 목표인 그녀
우리의 여행 코스는 아바나 3박 – 바라데로 1박 – 산타 클라라 1박 – 뜨리니닷 3박 – 아바나 4박이었다. 그중 처음 아바나에서는 어차피 돌아올 아바나를 대략 파악해 두면서 몸을 추스르는 전략으로 쉬엄쉬엄 다녔다. 먹성 좋은 우리 딸냄은 주로 돈 계산과 점심이나 저녁 식사할 식당을 찾는 역할을 맡았는데 아바나의 첫 시내 구경에서 우리는 대충 길을 좀 파악해보자고 했지만 딸은 ‘그런 목적 없는 싸돌아다님을 이해할 수 없소’라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래, 연인들도 여행을 같이 가면 다툰다더라.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30일 긴 유럽여행을 다녀왔는데, 같이 간 친구와 코드가 안 맞아서 가기 전부터 힘들어했다는 어느 청년의 말이 기억난다. 다녀와서는 그 친구는 어찌 되었냐는 질문에, 30일을 다 못 채우고 중간에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갔다고 대답하더라. 어지간하면 서로에게 맞추어 주는 나와 풀씨(남편)도 여행만 가면 ‘길을 좀 물어보자.’는 나와, ‘지도 보고 찾아가면 되지.’하는 그와 투닥거린다. 알고 봤더니 대부분의 여자와 남자들이 그런다고는 하더라만.
그래도 우리는 ‘인생 뭐 별 거 있니, 아무 데나 돌아다녀보기’ 디오게네스 정신, ‘목적지를 놓치면 놓친 길에서 더 재미난 걸 보더라’ 카르페디엠 철학, ‘시장이나 공터에 삶의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낮은곳에임하소서 사상의 공통점은 지녔다. 마냥 쏘다녀도 상관없고 유명한 곳 못 봐도 아랑곳하지 않는... 하지만 딸은 달랐다. 가령, ‘맛집 탐방’이었다면 딱 그녀의 여행 취향에 맞았을 것이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식탐 있는 자들은 맛있는 집을 잘 찾아내기도 한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맛과 냄새를 찾아내는 제 7의 촉수가 있긴 한 것 같다. 아바나 시내 탐방의 첫날 딸은 ‘빠에야를 먹으러 가자’가 목표였다.
음악이 피 속에 흐르나 보다
빠에야가 뭐냐. 볶음밥이다, 이거다. 원래는 스페인 음식이다. 사실 5년 전 네 식구가 스페인에 가서 엄청 짠 빠에야를 먹어보고 질렸던 바로 그 음식인데 한때 식민지였던 쿠바에서 빠에야를 찾는 건 쿠바한테 실례가 아닌가? 게다가 여행책자에서 소개한 맛집인데 뭐 굳이 책을 따라다녀야 하다? 싶기도 했지만 딱히 뭘 먹어야 할지 모르기도 했다. 그런데 딸아이를 쫓아다니며 힘겹게 헤매 찾아낸 빠에야 식당, 나쁘지 않았다.
옆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라틴음악을 연주해주는 아저씨들 힘내라고 밥 먹으면서 끊임없이 발로 박자를 맞춰가며, 쿠바 맥주랑 랍스타가 섞여 있는 빠에야를 잘 먹었다. 딸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한없이 천사가 되는 아름다운 소녀다. 나는 셋 모두 평안해진 이 기분이 좋아서 음악을 즐기는 척했다. 그런데 정작 ‘삶이 곧 음악’이며 ‘피 속에 바이브레이션’이 흐르는 김풀씨는 저 흥겨운 음악에 별 반응이 없다. 무슨 눈치를 챈 걸까? 아니나 다를까,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식사 도중 우리에게 다가와 “일본에서 오셨나요? 중국에서 오셨나요? 아, 코리아, 오우~, 혹시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들려드릴게요.” 이렇게 친절하시던 뮤지션 중 메인 보컬 아저씨가 급히 우리 남편을 붙잡고는 자신들의 연주 CD를 내민다. ...10쿡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