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쿠바 여행 9
‘중 1 영어’도 못 알아듣는 이런 귀..
바라데로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 또 호텔 조식도 못 먹고 7:30 산타클라라행 버스를 타러 비아술로 간다. 가까워서 버스터미널까지 슬슬 걸어가는 그 아침은 아름다웠다. 바라데로의 지형이 길게 바다를 향해 뻗어나간 곶이기 때문에 바다가 오른쪽에도 있고 왼쪽에도 있다. 동트는 아침 바다를 보며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니 또 어떤 택시 기사 아저씨가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건다. ‘어디로 가슈? 아바나 가슈?(Where are you going? Habana?)”이라고 물었건만 난 왜 그걸 “Where are you from? Habana?”으로 들은 게냐? 아바나로 갈 거면 택시로 가라고 흥정을 하려던 모양인데 난 대개의 택시 기사와 달리 영어로 친한 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가 “맞아요, 아바나에서 왔어요~!” 라고 엉뚱한 대답을 하자 놀랍게도 ‘듣기’에 능통한 풀씨가 다 알아듣고 “아니, 우린 산타클라라 갈 거유, 비아술 타고..”라고 말(?)해주었다(정확한 워딩은 전하지 않기로 한다 ㅋ).
쿠바에는 택시 타라는 삐끼나 숙소나 레스토랑 손님을 끄는 호객행위가 귀찮을 만큼 많긴 한데, 목적지를 밝히고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하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는다. 또, 다른 택시나 숙소를 잡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좋은 얼굴로 잘 가라, 좋은 시간 보내라고 따뜻하게 인사해 준다. 자기 택시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불쾌한 모습을 보이는 이는 만나지 못했다.
‘어린 년’으로 살기 녹록치 않다던
관광지의 호객행위는 명동만 나가봐도 우리나라라고 다를 바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나와 풀씨는 그런 치근덕거림이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딸냄은 골목골목에서 만나는 ‘친한 척 하는 아저씨들’을 몹시 싫어했다. 어떤 여행객 말이 골목 하나 지나면 열 번 이상의 성희롱을 감내해야 한다고 했는데 성희롱까지는 아니지만 젊은 남자들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딸냄을 한참 쳐다보거나 말을 걸기 일쑤였다. 휘파람을 부는 일은 다반사고 자기들끼리 ‘쟤좀 봐~’ 이런 느낌의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모습도. 우리가 보기엔 이방인에 대한 관심 정도로 느껴졌지만 딸은 그게 몹시 싫었던 모양이다. “뒷골목으로 가지 마, 남자들이 쳐다보는 거 싫단 말야~!” 그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맞다, 캣콜링은 분명 성희롱이다.
하긴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얼굴 하얗고 까만 머리가 긴 스무 살짜리 동양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일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그 무렵엔 동양인 관광객 자체가 거의 없었다). 나도 혼자 슈퍼에 뭐 사러갈 때 ‘치노?’ 이러면서 중국인 아줌마 취급도 받고 그랬지만 뭐 그러려니... 나도 우리나라 지하철에서 우리와 얼굴색 다른 아저씨가 앉아있으면 한 번 더 쳐다보곤 했던 과거가 있으므로...
하지만 딸의 짜증 섞인 절규를 ‘왜 과민반응이야?’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마침 여행 중 들고 간 책 <오늘의 교육 1+2>에 ‘민주시민교육을 그만두는 것이 가장 민주적이다’를 쓴 청소년활동가 호야가 자기를 소개하는 글에 ‘어린년으로 살기가 영 녹록치 않습니다’고 쓴 걸 읽었다. 그 짧은 소개글 한 줄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구나, 그런 거다...
딸도 얼마 전에 몇 번 ‘어리다고 다들 무시한다고오~’ 울분을 토한 적이 있었는데 ‘젊은 여성’이 느끼는 세상살기의 고단함이 새삼 공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리다고 무시한단 말야!
한 번은 딸아이 휴대폰이 고장 나 머리를 맞대고 가까운 수리점을 검색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가까운 곳을 찾아 알려주자 딸은 ‘같이 가달라’ 했다. 온 식구가 나서서 ‘네가 애기냐, 막내티 좀 내지 마라, 이젠 그런 거 혼자 해라’. 난리가 났다. 나 역시 수험생활 하던 딸애를 거의 밀착 보위하던 직전 해의 고단함이 떠올라서 대학생이 되고도 늘 가슴을 파고드는 아이한테 ‘네가 해 먹어, 너 혼자 해, 그만 좀 앵겨(안겨)!’ 그랬으니. 식구들이 모두 녀석의 ‘막내스러움’에 대해 경계를 한 셈인데 녀석은 이렇게 빽 소리를 지른다. “나 혼자 가면 다들 어리다고 무시한단 말야~!” 어디서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말해 보라 하니 수도 없이 많이 겪는단다. 물건을 사거나 주문을 할 때도, 알바를 할 때도 여러 군데서 ‘어린 여자’라 무시당한 경험이 있었다고 한다.
무슨 연유인지 이 사회에서 ‘젊음’과 ‘여성’을 특권적 단어로 오독하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그 이면에는 그렇게 단어를 이용하는 이들의 굴곡된 의식이나 사회현상이 반영되어 있을 터이고, 어쨌거나 한국에서 여성과 젊음은 권력에서 소외된 계층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김치녀니 된장녀니 하는 단어를 써가며, 아무 데나 커피 잔을 놓고 다니는, 엄마 돈으로 비싼 커피를 하루에 몇 잔씩 사 마시는, 자동차 없는 남자는 남자 취급도 안 하는, 그런 싸가지 없는 이미지를 ‘젊은 여성’의 이미지로 확대재생산한다. 이것은 젊은 여성들의 실체가 아니다.
까칠한 이를 만난다면
젊은 여자들이 조금 오연하게 보이는 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일지도 모른다. 무시당하기 전에 장막을 치는, 상처받을까 봐 쉽게 자기를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남자고 여자고, 어린이고 아이고, 자신감 있는 사람일수록 유연하고 상냥한 편이다. 주변의 누군가(학생들이나 젊은이)가 좀 뻣뻣하게 굴면 ‘뭐 저런 인간이 있어? 싸가지 없기는..’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그들이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 열패감을 잠시 헤아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