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에센셜 김수영
민음사의 새로운 시리즈 디 에센셜에 우리나라 작가로는 처음으로 김수영 편이 나왔다. 출판사로부터 보내주신다는 말을 듣고 문창과 강의 들을 때 무척 궁금해했던 김수영을 작품으로 드디어 만나는구나, 하는 마음에 감격스러워했다.
시인으로 알고 있었던 김수영의 작품들 중 에세이가 더 재미있었다. 시인들은 대체로 에세이를 잘 쓰는 것 같다. 시는 지금 읽어도 파격적인 내용이 있어서 당시에는 얼마나 센세이셔널했을까, 싶은 것도 있었다. 문창과 수업 들을 때 ‘풀이 눕는다’라는 시를 진짜 풀이 눕는 것인지, 아니면 민초를 뜻하는 것인지를 가지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게 생각났다. 그의 시와 에세이, 그리고 소설을 읽다 보니 전쟁을 겪으며 좌우 대립과 사상에 따른 편견, 그리고 지식인의 고뇌가 몽땅 스며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휴전 이후 어수선한 사회 모습을 정돈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벌였고, 권력을 잡다 보니 욕심이 생겼고, 참다못한 시민들은 봉기를 했다. 그런 난리통에 의용군이 되었다가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미 8군 수송관의 통역관이 되었다가 모교인 선린 상어 학교 영어교사도 한다. 결국 서울로 돌아온 그는 신문사에 잠깐 있다 나와 번역 일을 하며 양계도 한다. 참으로 다양한 삶의 여정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이런 경험은 고스란히 작품에 담긴다.
당시 지식인을 흔들던 사회주의에의 동경과 실제로 그걸 선택했을 때의 고민이 서로 대립하기도 하나 그다지 자유롭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 반감을 느낀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다른 시인에 비해 정치성향을 담기도 했지만(한 시는 정말 쇼킹하다) 그의 작품에는 유머러스한 여유도 묻어 나온다. 만년필이나 외국 잡지에 대한 집착과 애정, 그리고 술독에 빠진 듯 전혀 생각나지 않는 숙취, 그리고 양계의 어려움 등 생활 속 여러 에피소드가 웃음을 준다.
개인적으로 그의 일기가 너무 진솔하게 다가왔는데 문학인의 고뇌, 글을 돈으로 바꾸는 삶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글 속에서 그는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 책에는 미완성 소설 한 편이 실려 있다. 슬픈 죽음으로 인해 끝을 맺지 못했을까? 그는 밤 귀가 도중 버스에 부딪혀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 않고 오래 살면서 시와 에세이를 썼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현존하는 작품의 색깔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나오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를 떠올렸다. 책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두고 한 번씩 꺼내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 보물 같은 책이다. 이 책도 그런 책이 될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날카로우면서도 해학적이고, 다분히 철학적인,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솔직하고 진솔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 본문 —
- 요즘 시론으로는 조르주 바타유의 <문학의 악>과 모리스 블랑쇼의 <불꽃의 문학>을 일본 번역책으로 읽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고 나자마자 즉시 팔아 버렸다.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고 싶지 않다. 집의 서가에는 고본옥에서도 사지 않는 책만 꽂아 두면 된다. 이왕 속물 근성을 발휘하려면 이류의 책이나 꽂아 두라. 나는 한국말이 서투른 탓도 있고 신경질이 심해서 원고 한 장을 쓰려면 한글 사전을 최소한 두서너 번은 들추어 보는데, 그동안에 생각을 가다듬는 이득도 있지만 생각이 새어 나가는 손실도 많다. 그러나 시인은 이득보다도 손실을 사랑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발악이다. (409쪽)
- 앉으나 서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 방 안에 있을 때의 막다른(절박한) 생각과 밖에 나와 보고 느끼는 세계는 너무나 딴판이다. 세상은 겉도는 것이다. … 기침이 나고 넓적다리가 차고 시리다. 문학을 위하여서는 의식적으로 몸에 병을 만들어도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426-427쪽)
- 9월 13일 (432-433쪽)
일을 하자. 번역이라도 부지런히 해서 ‘과학 서적’과 기타 ‘진지한 서적’을 사서 읽자. 그리고 읽은 책은 그전처럼 서푼에 팔아서 술을 마셔버리는 일을 하지 말자. 알았다. 이제는 책을 사야 한다고. 피로서 읽어야 한다고. 무기로서 쌓아 두어야 한다고. 책을 쌓아 두어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떳떳이 앉아 있을 수 있다고. 불어도 배우자. 부지런히 배우자. 불란서 잡지를 주문해서 참고로 하자. 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의 참고로도 하자. 힘이 생긴다. 힘이 생길수록 시계 속처럼 규격이 째인 나의 머리와 생활은 점점 정밀하여만 간다. 그것은 동시에 나의 생활만이 아니기 때문에 널리 세상 사람을 고려에 넣어 보아도 그 시계는 더 정밀해진다. 진정한 힘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오오 창조. 일하자 일하자. 두말 말고 일하자. 어서어서 일하자. 아폴리네르의 교훈처럼 개미처럼 일하자. 일하자 일하자. 일하자. 민첩하게 민첩하게 일하자.
* 위 글은 출판사에서 무상으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솔직한 생각을 적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