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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Apr 15. 2021

되풀이되지 않도록

징비록 (유성룡)

  인문학 모임 이달의 도서라 아주 오래전 눈물 흘리며 읽었던 이 책을 다시 만났다. 우리에게 쓰라린 역사인 임진왜란을 그린 책이다. 웬만한 전쟁 영화보다 재미있는 당시의 기록은 실제이기에 더 애통하기도, 통쾌하기도 했다. 유성룡은 원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얻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좌의정과 병조판서를 겸했고, 도체찰사와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평양에 도착해서는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 다시 서울에 들어간 후 영의정으로 복직되었고, 선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훈련도감의 제조를 맡아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인재 양성과 군비 강화에 힘을 썼다. 정유재란 이후 다시 탄핵되어 고향에서 저술 활동에 힘썼다. 이 책도 그 시기에 썼다고 한다.


  임진왜란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겪으며 지휘했던 그는 당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그때 메모를 했을지도 모른다. 본문 중간에 그가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던 공책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사람의 이름과 지명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메모가 틀림없이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은 현재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책으로서는 드물다고 한다. 전쟁을 가장 직접적으로 겪은 그가 다음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하는 의미로 기록한 이 책 속에는 이순신 장군도 때때로 등장한다. 이번에도 장군의 활약을 읽으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나라만을 생각했던 그의 뛰어난 지략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책의 초중반은 계속 패하는 이야기라 맥이 빠진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우리의 군사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우수수 패하고 도망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나의 마음도 답답하고 힘들지만 결국 왜구를 몰아냈음을 알기에 그렇게 이어져 온 역사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계속 읽었다. 하지만 승리의 역사는 그렇게 길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중 결정적인 사건들만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기다리는 안타까운 장면과 이웃 나라의 전쟁에 힘을 다했던 장수와 군인들,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저자의 눈물겨운 투혼이 감동적이다.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의 승리로 보급과 군사 지원이 끊어지고, 의병과 명나라 지원군으로 패색이 짙은 일본이었지만 돌아가면서도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부산에 오래 머무르는 등 전쟁은 쉽지 않았다. 치질에 걸려 누워 지냈음에도 사신을 맞이하고 전국을 돌며 전쟁에 대비했던 유성룡의 노력과 애국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가 애씀을 통해 많은 이들이 힘을 얻고, 마음을 모았으리라. 전쟁이나 난리로 영웅이 탄생하기도 한다. 수많은 의병장들과 이름 없이 죽어간 조상들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다시 또 이런 외침이 있지 않도록 수백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긴 저자의 경고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전 두 개로 나뉘어 서로 다툼을 하며, 전쟁의 위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이 큰 화를 불렀다. 지금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지 모른다. 외세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고, 나라는 분열되어 있다. 서로를 헐뜯기 바쁜 이때 조상이 경고한 메시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 귀신 장군이라는 말을 들었던 이순신 장군처럼 태평성대에 안일해지지 말고 늘 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33년 처음 출간된 후 일본에도 그 가치가 알려져 1695년 일본 교토에서도 간행되었고, 1712년 조선 조정에서 일본 수출을 엄금하는 명을 내리기도 했던 소중한 우리의 보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겠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 본문 내용 ---


- 나도 중국 병사들과 함께 들어갔는데 성 안의 백성들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는데, 살아있는 사람들조차 모두 굶주리고 병들어 있어 얼굴빛이 귀신같았다. 날씨마저 더워서 성 안이 죽은 사람과 죽은 말 썩는 냄새로 가득했는데 코를 막지 않고는 한 걸음도 떼기가 힘들었다. 건물은 관청과 개인 집을 막론하고 모두 없어져 버렸고, 왜적들이 거처하던 숭례문에서 남산 밑에 이르는 지역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와 세 대궐, 종류, 각 사, 관학 등 대로 북쪽에 자리 잡은 모든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재로 변해 있었는데, 소공주 댁은 왜장 히데이에가 머물던 곳이라 건재했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은 다음 엎드려 통곡하였다. (173-174쪽)


-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군량 운반에 지친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힘이 있는 자들은 모두 도적이 되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여 살아남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잡아먹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죽이는 지경에 이르러 길가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흩어져 있었다. (180-181쪽)


- 이순신이 한산도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지었다. 그는 그곳에서 장수들과 함께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투를 연구하면서 지냈는데, 아무리 졸병이라 하여도 군사에 관한 내용이라면 언제든지 와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군사에 정통하게 되었으며,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장수들과 의논하여 계책을 결정하였던 까닭에 싸움에서 패하는 일이 없었다. (191-192쪽)


- 적장 마 다시는 수전에 뛰어난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20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서해로 가려다 진도 벽파정 아래에서 이순신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12척의 배에 대포를 실은 이순신은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기로 했다. 물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에 나서자 그 많은 적도 당하질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순신 부대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당시 이순신 휘하에는 8천 명이 넘는 병사가 모여들어 고금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는 해로 통행첩을 만들기로 하고 명령을 내렸다. “3도 연안 지방을 통행하는 모든 배 가운데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선으로 간주하고 통행을 금지한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와서 통행첩 발급을 요청했다. 이순신은 배의 크기에 따라 쌀을 받고 통행첩을 발급해 주었는데, 큰 배는 3석,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을 받았다. 당시 피란을 떠나는 배들은 모두 양식을 싣고 다녔기 때문에 그 정도 쌀을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며, 오히려 안전하게 다닐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순신은 10여 일 만에 1만여 석의 군량을 얻을 수 있었다. (204-205쪽)


- 100년에 걸친 태평성대로 인해 우리 백성들은 전쟁을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왜적의 침입을 맞게 되자 우왕좌왕하다가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당시 적은 파죽지세로 몰아닥쳐 불과 10일 만에 서울까지 들이닥쳤으니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손을 써 볼 겨를이 없었으며, 용감한 장수라 하더라도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민심 또한 흩어져 수습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방법이 서울을 함락시키는 데 뛰어난 계략이었던 것이다. (223쪽)



* 목소리 리뷰: https://www.podty.me/episode/1563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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