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지막이 일어났다. 아침에 부지런 떨며 책이라도 읽을까 했는데 여행 오니 정말 게을러진다. 아침을 먹으러 갔다. 조식이 꽤 알차게 나왔다. 사려니 다녀올 때까지는 점심을 먹지 못할 걸 생각해 배가 부르도록 먹었다. 렌터카를 반납하고 셔틀버스로 공항까지 이동했다. 터미널 가는 버스를 타고 가 바로 터미널 안쪽에 서 있는 사려니 가는 버스에 올랐다.
사려니 입구에 도착하니 저번에 본 관리용 미니카가 보여 반가웠다. 처음 들어갈 때만 해도 날씨가 화창했는데 조금 걷다 보니 멀리에서부터 우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햇살도 있는데 웬 우레 소리인가 했더니 하늘이 점점 흐려지다 중간쯤 가서는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나뭇잎이 비를 가려 주어 걷는 땅이 말라 있을 정도로 조금씩 왔는데 물찻오름을 지나 정자에 앉아있을 때부터는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말초신경이 손상되어 제주에서 혼자 요양 중이라는 60세의 한 여성 분이 자리를 깔고 앉아 우리에게 떡을 권하시며 하루 2만 보쯤 엄청 많이 걷는데 수없이 다닌 곳 중 사려니가 가장 좋다고 하셔서 나도 동의했다. 조금 있으니 다른 분들도 모여 비가 그치길 함께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빗방울이 조금 가늘어지는 느낌이어서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조금 걷다 보니 거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소리도 들렸다. 처음에는 핸드폰이 젖을까 걱정하며 최대한 나뭇잎 아래로 걸었는데 10분쯤 지나니 흠뻑 젖어버렸고 신발 안까지 물이 들어와 축축해졌다. 우리는 아까 그 정자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는데 쉽게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아 그냥 가기로 했다. 나중에는 남편 가방에 핸드폰을 넣고 아무 생각 없이 물웅덩이를 철벅이며 그냥 걸었다. 다 젖고 나니 아까의 걱정은 사라지고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말할 때마다 빗방울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우리는 이런 비 언제 또 맞아 보겠느냐며 연신 깔깔댔다. 아름다운 우중 사려니를 사진에 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었다. 한 시간 정도 걸었을까? 아직 멀었겠거니 했는데 벌써 입구가 보였다. 비는 더 세차지고 천둥과 번개까지 쳐서 깜짝 놀랐다.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어 짜서 입고 머리를 휴지로 대충 닦고 운동화 속 흙탕물을 물로 씻었다. 흙이 많이 묻은 양말을 버리고 신발을 신었더니 철벅거려 거꾸로 해 물을 좀 빼고 신었다. 원래는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시청 부근에서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버스를 기다릴 상황도 아니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어 택시를 타고 바로 호텔로 갔다. 비에 쫄딱 젖은 우리를 태워주신 기사님께 감사했다. 택시에서 보니 비가 45도 각도로 세차게 쏟아졌고 길에 웅덩이도 많았는데 호텔에 가까워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햇살이 반겼다. 50분 넘는 동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추워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뜨거운 물로 씻었다.
젖은 옷을 들고 세탁방에 가 돌려놓고 4시쯤 점심을 먹으러 호텔 근처 맛집을 검색해 '제주 육대표'라는 곳에 갔다. 걸어갈 수 있어 좋았고 평점이 좋았는데 맛도 감동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수영을 하러 갔다. 아까 맞은 비로도 충분히 물에 질렸을 것 같은데 어제 산 남편의 수영복 대용 반바지가 아까워 잠깐 몸을 담그기로 하고 수영복을 갈아입고 올라갔다. 자쿠지가 있다고 했는데 물이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고 수영장 물도 29도 정도여서 처음 들어갈 때 차갑다고 느꼈다. 개구리헤엄을 열심히 치다 보니 춥다는 생각이 가셨지만 밖에만 나가면 너무 추워 오래 있지 못하고 30분 만에 나왔다. 공항의 비행기가 보이는 꼭대기 층 수영장 통창의 전망은 환상적이었다.
저녁을 먹지 않을까 하다가 밤에 배가 고플까 봐 씻고 수영복을 건조시키러 나갔다가 검색으로 맛집을 또 발견했다. ‘가락’이라는 제주형 라멘집이었다. 좀 오래 걸었으나 밖에서 보는 외관도 멋졌고 짭짤한 맛도 괜찮았다. 하루 종일 이만 보 넘게 걸으며 다리가 무척이나 피곤했지만 돌아보니 잊지 못할 하루였다. 내 생애 동안 한 시간 넘게 폭우를 맞으며 산길을 걸을 날이 또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