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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Feb 04. 2021

제주, 바다가 부르는 소리

2월 3일 제주 첫 날 - 데미안, 귤 그리고 바다

  6시 7분, 집을 나섰다. 영하의 새벽  추위가 매서웠다. 행인 없는 적막한 거리. 잠시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있을 수도 있었는데 하는 생각. 제주는 어떨까? 오늘 3도~9도, 내일 6도~8도. 봄 날씨다.


  버스 환승하며 8분정도 서 있으면서 오들오들 떨었다. 이 새벽에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찬송이 울려퍼지는 버스는 처음이다. 아침에 성경 못 읽고 그냥 나왔는데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55분 공항 도착 예정. 디지털 발권 했고 50분 비행기이니 적당히 일찍 도착한 셈이다. 물만 먹고 나왔더니 배가 고프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살 것 - 물, 김밥, 칫솔 세트


  코로나 이후 비행기 처음 탔다. 들어가는 동안은 1미터 유지했으나 기내에선 다닥다닥 붙어 앉아 갔다. 말 하는 이 한 명 없는 조용한 이동. 혼자 제주 와서 렌터카 이용하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편리할 듯하다. 셔틀로 이동 중인데 버스에 혼자 탔다. 운전기사분이 이름을 확인했다. 무단 탑승을 막기 위해서일까?. 가족 식사 걱정에 용돈을 좀 얹어 보내고 내일 도착할 곰탕 끓여 먹는 법을 장문의 문자로 보냈다. 오늘 목표지인 데미안 돈가스집이 아직 문을 안 열었는지 전화를 안 받는다. '제주에서 당신을 생각했다'라는 책에서 제주로 이주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너무 인상깊어 결심한 제주 여행이다. 꼭 이 집에서 돈가스를 먹어보리라 생각했다. 11시 오픈인데 10시쯤 다시 전화해 봐야겠다. 어제 미리 예약할 걸 그랬다. 11시까지 연락 안 되면 근처서 기다렸다 예약 가능한 가장 빠른 시간으로 잡아 놓고 근처를 어슬렁거려야겠다.


  데미안. 전화 안 받고 문자 답이 없어 브로그에 들어갔더니 예약을 받지 않는다고 씌어 있었다. 가는 길 일부러 해안도로로 갔는데 책에서 본 이호해변 가는 길이 있어 왔다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흰 파도 떼를 만났다.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빨강과 흰색의 말 모양 상. 제주는 곳곳이 명소다. 오랜만에 듣는 진정한 파도 소리 시름을 잊게 만든다.


  바로 이동할까 하다가 다시 차를 대고 걸어서 붉은 말이 있는 곳에 가 보기로 했다. 아래서 굴착기로 연신 작업 중이던 곳을 보니 해초들과 쓰레기를 모으는 작업이었다. 바다 내음이 물씬 풍긴다. 비린내가 아닌 향긋한 해초 냄새. 파도 소리가 점점 커진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목 긴 왜가리. 비행기와 파도 소리 자연과 사람, 기계와 파도. 내가 바다를 좋아하는 걸 최근 알게 되었다. 파도에 부서지는 반짝이는 물결 눈부시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극치.


  흰 말 옆 강태공. 등대 옆 파도타 젊은이. 난간 옆 인명구조함. 인적은 드물고 핫바 가게는 비었으나 파도는 아랑곳없이 재주를 넘는다. 이호. 혹시 두 마리의 말인가? 그게 아니라 쌍원담(밀물 때 들어온 고기들이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설치한 곳)을 이르는 말인가보다.


  몽돌해변이라는 말에 그냥 가지 못하고 차를 세웠다. 생각했던 작은 돌이 아니라 중대형 몽돌이다. 파도는 여전히 우람하다. NAEDO라 적힌 철판이 있다. 외도 초등학교. 선명한 색상의 외관, 교문 현무암과 잔디운동장이 독특하다.


  구엄리 돌염전을 제대로 못 보고 지나쳤다. 절경인 듯 보였다. 바다 구경하다 레스토랑에 예상보다 30분 늦었다. 오랜만에 본 네비게이션 기계 하단 시간이 도착 시간인 줄 알았더니 현재 시간이어서 도착 예정이던 11시에 그걸 알고 최대한 빨리 달렸다. 책에서 보았던 입구. 책에 있던 사진보다 살짝 빛이 바랜 팻말에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입구에서 문을 열다 놀랐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가게가 아직 있을까 걱정했는데 성황이어서 다행이다.


  좀 전에 한 팀 나갔으니 곧 내 차례겠지? 좀 있으니 다른 팀이 들어왔다. 이 분들은  기다리셔야겠다. 책에서 본 직접 개조했다는 아기자기한 천장과 벽면, 화장실이 정겹다. 한 명인 팀은 나 뿐이다. 다음엔 가족과 같이 와야지.


  돈가스를 너무 맛있게 먹었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라는 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나온 전복죽은 짭짤하고 고소한 깨가 씹히는 정말 감칠맛 나는 메뉴였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까 정말 빨리 다 먹고 마당으로 나와 감귤 쥬스를 먹으며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잠깐 읽었다.


  호텔 가는 길에 무언가 볼거리가 있는지 찾다가 있으면 아무 곳이나 들어가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데미안 바로 앞에 유람이라는 카페가 보였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카페인 줄 알고 지나치려 유리창 사이로 쌓여 있는 책들이 보여 바로 시동을 끄고 내렸다.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들어가니 양쪽 다락처럼 생긴 아지트가 있고, 튼튼하게 생긴 긴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판매하는 책 외에도 정말 많은 책들이 꽂히고 쌓여 있었다. 이곳에서 호텔 가기 전까지 시간을 보내리라 생각했다.


  카페 유람에서 처음 들어본 작가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라는 소설집의 첫 이야기(책 제목과 동명) 재미있게 읽고 그녀의 서사 방식이 마음에 들어 온라인 서점에서 헌책을 검색해 구입하고, 강영숙의 장편소설 '라이팅 클럽'도 그렇게 했다. 헌책인데도 비교적 가격이 높은 '소설을 쓰고 싶다면'을 구입하려고 했는데 그 책은 없어서 작고 얇아 여행 동반자로 좋은 오수영의 `순간을 잡아두는 방법`이라는 독립출판 도서를 구입했다. 커피도 맛있고, 좋은 책이 많은 보물섬 같은 곳이었다.


  그곳을 나와 숙소까지 천천히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기로 했다. 아까 보지 못한 구엄 돌염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비게이션이 계속 해안도로가 아닌 더 빠른 길로 안내하는 바람에 바다를 보다 말다 하며 아주 천천히 달렸다. 내 뒤의 차들이 답답했을 것이다. 한참 가다가 귤 농장이 보였고, 그동안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귤따기 체험을 한 번 해 볼까 하 검색을 해 보니 그곳에서 7분 거리에 '부가네 감귤농장'이라는 감귤 따기 체험장이 있었다. 혹시 겨울이라 하지 않는 건 아닌가 하고 전화를 해 보니 낮에는 가능하다고 했고, 5천 원에 실컷 따 먹고 20개를 따 갈 수 있다고 했다.


  도착해서 보니 한적한 동네의 자그마한 농장 안에 한 커플이 귤을 따고 있었다. 설명을 듣고 가위를 들고 귤을 따러 들어갔는데 끝물인 듯 못생기고 시들고 작은 상품 가치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껍질은 까서 바로 바닥에 버리면 된다고 했다. 바닥에 껍질을 던져 가며 먹는 재미가 있었다. 새소리만 들리는 적막강산, 감귤나무들 사이를 거니는 내가 조금은 청승맞고, 대체로 여유로웠다. 기대했던 싱싱한 귤은 아니었지만 따서 먹어보니 생각보다 달고 맛이 좋았다. 대여섯 개를 까먹으면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들로 선별해 봉지에 담았다. 굉장히 크고 껍질이 딱딱한 과실이 있었는데 작은 걸 하나 따 엄지손톱이 부러지도록 겨우 까서 베어 먹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새콤달콤한 맛이어 큰 것으로 세 개 따서 담았다. 일반 귤나무보다 키가 작았는데 이것 역시 점이 많고 못생긴 것만 남아 있었다. 까서 먹으려면 과도가 필요할 것이다. 평범한 귤들도 땄는데 합쳐도 20개 안 될 것 같았으나 2박 3일 동안 어차피 혼자 다 먹지도 못할 것 같아 그냥 나왔다.


  다시 해안도로를 찾아 달렸다. 지나친 줄 알았더니 돌염전이 떡하니 나오는 걸 보고 정말 반가웠다. 그런데 생각했던 소금은 거의 없었고, 사람들만 왔다갔다 했다. 자세히 보니 소금인지 모래인지 모를 허여무레한 가루들이 보이긴 했다. 염전보다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박력 있고 멋져 동영상을 찍고 한참을 바라보다 이동했다.


  숙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거리의 모습은 담장 안에 귤나무가 보이는 것 말고는 평범했다. 데미안을 운영하는 부부처럼 제주도에 와서 정착하고 살면 심심하긴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가장 부러운 건 과실나무를 마당에 심어 놓고 따 먹는 것이다.


  그동안 용두암 쪽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주로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시내 쪽 '호텔'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스트하우스로 예약했다. 주차기계가 있긴 했으나 사람이 별로 없어서인지 문 앞에 차를 대라고 했다. 올라와 보니 네모 반듯한 방은 아니지만 대체로 깨끗하고 햇빛도 잘 들어와서인지 냄새도 나지 않아 쾌적했다. 덜 마른 파자마를 옷걸이에 걸고 잠깐 메모를 다. 조금만 쉬다가 근처 음식점과 카페를 찾아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한다. 그런데 책을 두 권만 가져온 줄 알았더니 놓고 오려고 생각했던 책 한 권이 더 들어 있었다. 두 벌 옷과 다른 짐 대신 책과 노트북을 챙긴 것인데 읽지 않으려던 책까지 들고 온 걸 보니 살짝 억울한 마음이 들어 할 수 없이 그 책까지 다 읽고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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