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고등어조림 정식을 너무 맛있게 과하게 많이 먹었다. 호텔 근처에 있었는데 8천원 정식에 비해 호화로운 갖가지 반찬을 남기기 미안해 꾸역꾸역 들어갈 때까지 먹었다. 아침에 일찍 깼는데 뱃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 약간의 허기라도 느껴지길 기다려 조식을 먹었다. 토스트와 계란으로 간단한 아침이지만 사려니 통과하려면 든든히 먹어 두는 게 좋다.
생수통을 채우고 만반의 준비를 한 후 차에 올랐다. 그동안 항상 버스로 갔던 그곳에 운전해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느긋했다. 잠깐 가다 보니 스타벅스 드라이브스루가 보였다. 갑자기 커피가 너무 먹고 싶다는 걸 깨달았다. 차를 돌릴까 하다가 신호가 바뀌기에 그냥 지나쳤다. 계속 커피 먹고 싶다 먹고 싶다, 하는데 도로변에 감성커피가 보였다. 차를 대고 얼른 들어가 대형 커피를 사서 나왔다. 1900원 행복.
조금 가다 언덕이 나왔는데 아뿔싸 차가 힘겹게 올라가는 것이다. 오늘 산을 간다는 생각 않고 2박3일 24000원에 혹해 경차를 덜컥 계약한 것이다. 힘들면 어쩌지? 사려니 길은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무사히 도착했다. 그래도 속도가 잘 안 났는데 뒤에서 큰 트럭이 딱 붙어 따라와 신경이 쓰였다.
10시. 붉은오름 쪽 입구로 들어섰다. 바람이 싸늘하지만 좀 있으면 몸이 데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간혹 보인다. 사려니 숲에도 난데없이 등장한 마스크 낀 하루방. 입구에서는 귀가 시릴 정도로 바람이 불었는데 오히려 안은 바람 소리만 들리고 포근하다. 처음 맞은 사려니의 겨울 정취. 뒤에서 따라오는 발걸음이 들려 추월하게 두었다. 치마를 입은 여학생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적적하지 않겠다. 부지런히 따라가야겠다. 출발할 때 2000보쯤 되었을까? 10시 22분. 지금은 3500보. 신발이 헐렁해 끈을 동여맸다. 아직 노루는 안 보인다.
여름에는 잠깐 보이는 해가 싫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몇 활엽수들이 잎을 떨군 자리마다 푸른 하늘이 환한 태양빛과 함께 드러난다. 사려니가 4계절 좋은 이유. 바닥이 촉촉하다. 중턱에 비가 왔었나보다. 까마귀를 비롯한 각종 새 소리 덕에 밀림에 온 느낌이다. 누가 때려서 맞은 것처럼 ‘아, 아’ 거린다.
10시 38분. 5300보. 치마 입은 소녀가 사라졌다. 얼굴을 보지 않아 어른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늘 통과할 수 있을까? 아까 물찻오름 통제한다고 씌어 있는 걸 본 것 같다. 꼭 끝까지 갈 수 있기를. 이곳 주변에도 가볍게 걸을 곳은 많지만 세 시간 정도 대체로 평지인 길을 걸어 통과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기는 나만의 작은 산티아고.
현 위치 7(7km) 10시 54분. 6900보. ‘월든’이다. 녹지 않은 눈이 군데군데 보인다. 눈 온 다음에 오면 정말 예쁜 겨울을 느낄 수 있겠다. 이제 탐방객이 뜸하다. 주로 혼자 걷고 가끔 사람을 만난다. 숲과 내가 하나가 된 느낌이다. ‘아, 아’ 소리가 합창을 한다. 월든을 지났다. 설명을 잘못 봤나보다. 물찻오름 쪽으로 간다. 3분의 1정도 왔다. 세 바퀴 자동차가 갑자기 나타났다. 숲 관리자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전에 해질 녘 두려움에 혼자 이 길을 걸었던 생각이 난다. 아직 오전 11시 4분이라 괜찮다. 물이 졸졸 흐르던 개울이 말랐다. 여기부터 서귀포시라 한다. 도보로 시 경계를 지난다. 산티아고였으면 국경을 지났겠지.
혼자 걸은 지 20여 분. 마스크를 빼고 안쪽 물기를 닦았다. 이제부턴 빼고 다녀도 되겠다. 손목에 마스크를 걸었다. 11시 24분. 만 보. 물찻오름을 지났다. 이제 반 넘은 셈이다. 멧돼지 출몰 지역이라는 플래카드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 출발했다. 멧돼지를 만나면 도망가지 말고 천천히 뒷걸음질로 나무 뒤에 숨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좀 무섭긴 하다. 사람이 나타나면 좋겠다. 혹시 멧돼지를 만나면 가방을 방패로 사용해야지. 나무막대를 들고 갈까 하고 길고 튼튼하게 생긴 걸 잡았는데 물을 잔뜩 머금은 나무가 너무 무거워 포기했다. 멧돼지가 있다면 그 많던 노루들은 어쩌나? 두 번째 개울도 말랐다.
콧노래 부르시는 노신사를 지났다. 노래가 위안이 된다. 표지판이 없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오늘은 노루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노루는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나뭇잎이 떨어져 숨을 곳이 없으니 더 깊은 숲속으로 숨었는지 모르겠다. 내리막길이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화장실을 지나쳤나보다. 이제 3킬로미터 남았구나. 12시 8분. 15000보. 차 있는 곳까지 가는 버스가 지나갔다. 화장실을 모르고 스쳐버려 화장실에 들렀다 쉬려고 쉬지 않고 걸었다.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떼죽나무와 나도밤나무 이름에 얽힌 이야기. 마지막 구름다리 계곡에는 물이 느리게 흐르고 있다. 화장실만 아니면 어제 딴 귤 까먹으며 쉬었다 가고 싶다. 드디어 도착했다. 12시 36분 18000보. 너무나 반가운 화장실. 버스도 갔고 택시도 없지만 이제 기다릴 수 있겠다.
바로 오는 버스가 있어 무조건 하산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탔다. 많이 들어본 교래사거리. 거기에서 붉은오름 가는 버스가 두어 대 있어 내려 횡단보도를 지나 다른 정류장을 향해 조금 걸었다. 눈앞에서 날던 까마귀에게서 변이 떨어지는 걸 목격하고 올려다보니 까마귀 떼가 머리 위 전선줄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새똥 맞을까봐 정류소까지 뛰었다. 곧 버스가 올 것이었다. 이제야 물을 한 모금 먹고 어제 딴 귤로 당분을 보충했다. 한 번에 네 개를 다 까먹었다. 이 글 쓰다 버스 놓칠 뻔했다. 얼른 뛰어 131 버스에 올랐다. 바로 한 정거장 다음인데 꽤 오래 달렸다. 반가운 붉은오름, 깜찍한 미니카.
표선 해안도로에서부터 바다를 보며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해변이 외국에 온 것처럼 이국적이었다. 바람이 불고 다리가 아파 모래사장은 걸어보지 못하고 올라가는 길에 두루치기를 먹으려고 들렀으나 재료 준비 중이어서 발길을 돌렸다. 성산의 한 바닷가에 갈매기 떼가 즐겁게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파도를 넘실넘실 타며 물속에서 먹이를 채는 네 마리의 갈매기. 하늘을 나는 아이들과 돌 위에서 나를 구경하는 친구들. 끼룩끼룩, 나도 파도 타고 싶다. 활강하고 싶다.
계속 해안을 따라 운전했다. 신산해안도로, 광치기 해변을 지나 말로만 듣던 성산일출봉을 보았다. 다리가 아파 올라가보지는 못했다. 잠깐이라도 구경하려고 내릴 때마다 바람이 매섭다. 배가 고프기 시작한지 한참 되었는데 세 시가 넘어 음식점에 앉았다. 보이는 가게를 검색해 점수가 높으면 들어가기로 했는데 그전에 들른 세 개의 음식점은 재료 준비 중이거나 휴일이거나 신문이 끼워진 채 닫혀 있어 결국 돌하르방 뚝배기식당이라는 곳에 앉았다. 매콤한 게 먹고 싶어 해물라면을 시켰는데 숭숭 썰어넣은 청양고추가 보일 정도로 맵지만 맛이 좋아 공기밥을 추가해 거의 다 먹었다. 사장님과 연변쪽 분으로 보이는 조리사 두 분의 담소가 주인 아주머니의 친절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아 먹는 동안 마음이 푸근했다.
성산일출봉에서 나와 하도리 토끼섬을 지나는 해맞이 해안로로 들어섰다. 예쁜 카페도 식당도 심심찮게 나타났지만 어촌 마을임을 보여주는 신선 처리시설 건물도 보였다. `행원 풍력발전단지`라 씌어있는 큰 건물을 지났다. 얼마 전부터 풍차처럼 생긴 대형 바람개비들이 서 있였다.말로만 들었던 함덕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카페델문도’라는 책에서 본 카페가 보여 잠시 내렸는데 바람이 너무 차갑고 세차게 불었다. 카페 안에서 바다가 보이는 쪽은 이미 사람들이 다 앉아 있고 너무 어수선하여 그냥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계속 바다를 볼까 하다가 어두워지려고 해서 해 지는 것만 잠깐 보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 사려니에서 2시간 30분정도 걸었는데 화장실을 놓치는 바람에 오래 참았다. 앞으로 사려니 갈 때는 입구에서 화장실 들르고, 중간에 화장실 꼭 찾아 들를 거다. 들어가기 전에 커피 먹지 않기! 겨울에는 새를 제외한 동물은 보이지 않는다. 나뭇잎이 떨어져 햇살이 따사로운 겨울의 사려니. 사계절 언제든 좋은 곳. 나의 작은 산티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