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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Feb 05. 2021

제주는 바다

2월 5일 제주 마지막 날 - 용두암

  새벽 두 시 반에 깨었다. 책 읽느라 불을 켜 두고 자고 있어 불을 껐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혼자 호텔 방에 누워 있으니 며칠 전 꾼 악몽이 생각나 조금 무섭기도 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마지막 날 일정을 짠 다음 작가들의 팟케스트를 듣다 네 시 쯤 잠들었다. 요즘 꿈을 자주 꾸는데 늘 너무 생생한 것이 묘하다. 오늘은 소파에서 아이들과 TV를 보는 꿈이었는데 사진으로만 남은 아이들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깔깔대며 리모컨 싸움 하는 모습, 딸의 볼록한 배와 통통한 볼을 한 옆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남편이 샤워 하고 웃통을 벗은 채 맞은편 소파에 앉으려 뛰어오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걸 보다 잠에서 깨어 모두 꿈이라는 걸 알았다. 5시 반이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커버린 아이들의 그리운 어릴 적 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편에게 오늘 하루 조심히 다니라고 말해주어야겠다.


  제주항에서 시작해 용두암을 거쳐 이호테우 해수욕장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간 다음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차를 반납하기로 했다. 숙소에서 10분 거리의 제주항은 입구에서부터 주차장이라 내부를 보지 못하고 차를 돌렸다. 바닷가 길을 따라 가다 수산물 공판장을 통과했다. 생선 담는 나무 상자들이 층층이 탑을 이루고 있었고 생선을 파는 상인들과 구경하는 분들로 분주했다. 다시 도로로 나왔다가 호텔이 즐비한 바닷가 길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길 따라 걷고 있어 잠깐 내려서 보니 담 밖은 바로 바다였다. 바다와 길을 잇는 담에 새겨진 바다 속 풍경이 아기자기하다. 푸른색과 흰색 물감을 대충 섞어 뿌려 놓은 듯한 그라데이션 하늘.


  용두암과 용연다리 모두 그대로다. 제주 올 때마다 묵었던 게스트하우스가 반갑고 근처의 가게들을 보니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용두암 쪽을 걸을까 하다가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고 바람이 싸늘해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려오는데 예전에 들렀던 바닷가 카페가 나를 불렀다. 여기서 잠깐만 바다 구경을 하고 가야지, 하며 주차를 했는데 차량 반납 장소가 시내가 아니고 바로 2분 거리의 용담이었다. 다음 목표지 갈 것도 없이 (이호테우 해변, 심심 카페는 다음 기회에) 이곳에서 바다 구경 실컷 하다가 차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가야겠다. 이렇게 가벼운 기분이라니. 원래 곶자왈에 가고 싶었는데 왕복 한 시간 반이나 걸려 마지막 날까지 차에서 보내긴 싫어서 가까운 곳으로 택한 것이었다. 갈 곳을 남겨두어야 또 오고 싶어질 것 같다는 변명. 


  창 넓은 카페, 바로 아래 넘실대는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작은 소용돌이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멋지게 하강하는 비행기(예전에 비해 많이 줄었다), 비록 파도소리보다 커피 가는 소리가 크게 들리긴 하지만 바다 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어제 해변을 달리다 바다 구경 차 들어가고 싶었던 카페들을 그냥 지나친 아쉬움을 여기서 달랜다.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남편과 즐겨 가는 인천 구읍뱃터에 갔을 때다. 남편이 친구와 통화 중 아내가 바다를 좋아해서 보러 왔다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내가 바다를 좋아했었나? 나는 교사인 부모님 덕분에 남해읍에서 태어나 한 시골에서 자랐다. 바다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을 남해에서 보냈다고 하면 다들 바닷가에서 산 줄 안다. 소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경기도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부모님은 울산으로 이사를 하고 창 전체가 바다인 방어진의 바닷가 아파트에서 몇 년 사셨다. 태풍 때 유리창이 부서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부모님 댁에 갈 때마다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오래 전 혼자 호주에 갔을 때, 맨 처음 바다를 보았던 기억도 잊을 수 없다. 오랜 비행과 언어 장벽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렸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시드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다였다. 써큘러 키, 하버 브리지, 바다 옆 오페라하우스를 발로 밟고 또 밟았었다. 제주에 올 때마다 용두암 쪽 숙소를 잡은 것도 바다를 보기 위함이었다. 사방 어딜 가도 바다인 제주가 좋다. 


  비행기가 서자마자 안전벨트를 푸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며칠 전 읽었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벨트 푸는 소리가 다다닥 들렸다. 복도 쪽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있다. 이번에는 코로나 교차 감염을 피하기 위해 앞좌석부터 순서대로 내리라는 방송이 나왔고, 사람들은 대체로 질서를 지켰다. 무척이나 신속한 한국인. 


  내가 딴 귤을 반도 못 먹고, 버리기 아까워 배낭에 넣었더니 짐이 무겁다. 가족 선물 봉지까지 가방이 세 개가 되었다. 바로 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인도에 두터운 눈이 남은 걸 보니 내가 없는 동안 눈이 많이 왔었나보다. 조금 가다 보니 불법 플래카드를 뜯는 분들이 보였다. 왜 정해진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거는 것일까? 버스를 갈아타야 해서 내렸는데 언제 올지 기약이 없어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탔다. 여성 택시 운전기사 분은 처음이어서 신기하고 멋져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해 지기 전까지만 운행한다고 한다.


  집에 오자마자 허기진 배를 매콤한 라면으로 채우고 귤을 하나 까먹었다. 선물로 산 방향제가 별로인지 딸이 몇 번 킁킁거리더니 시큰둥해 했다. 아침에 보았던 어릴 적 내 딸, 작은 것에도 감탄하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샤워를 빡빡 하고, 가져갔던 옷을 모두 빨았다. 여행의 피로를 모두 씻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의식이다. 여행 첫 날 북카페에서 온라인 주문한 책들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 책을 들고 카페로 걷는 길, 사려니 걷던 기억이 떠올라 벌써부터 다시 가고 싶어졌다. 언제 다시 가게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는 가기 며칠 전부터 미리 걷기 연습을 해야겠다. 사려니와 바다가 있는 제주,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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