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처음 가 본 웅진백제역사관과 송산리고분의 무령왕릉
무더웠던 지난 여름의 공주를 떠올려 본다. 걷기에 한참 열을 올리던 그 시기, 핏빗을 사서 매일 만 보를 채우던 그 때 나는 공주의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말로만 듣던 무령왕릉을 비롯한 여러 유적지와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보고 싶어 미리 검색을 해 동선을 짜고 출발했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계속되어 걱정되긴 했다. 사실 남편과 제주에 가고 싶었지만 남편만 2박3일로 보내고, 고3 막내를 생각해 당일 코스를 잡은 것이다. 코로나로 집에서 공부하던 딸이 하루 종일 공부하는 학원에 들어간 둘째 날이었기 때문에 밥 챙겨 먹일 걱정이 없어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1. 메타세콰이어 길
아침에 제주 가는 남편을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공주로 향했는데 출근 시간대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이 막혀 두 시간 남짓 예상했던 여정이 세 시간이나 걸려 점심 먹을 때가 되었다. 화장실이 급해 초입에 있는 메타세콰이어 길에 먼저 가서 탁구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노익장을 과시하는 한 남자분이 열심히 혼자 탁구를 치고 계셨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 조용히 화장실을 이용하고 나와 메타세콰이어길에 올랐다.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시원한 길이었다. 옆에 있는 연꽃 군락도 예뻤으나 뜨거운 햇살에 가서 보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짧은 500미터 정도의 길이라 잠시 걸어본 후 다시 차를 타고 무령왕릉으로 향했다. 주차비가 무료여서 그곳에 주차를 하고 시내까지 택시를 탄 후 걸어 다녔는데 시내 곳곳에 무료 공영주차장이 많아 차로 다닐 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2. 산성시장과 로컬커피
햇살이 너무나 따가워 걸어 내려가려던 걸 포기하고 버스를 기다렸으나 버스가 다니지 않아 택시를 탔다. 산성시장에 내리고 보니 너무 가까운 길이었지만 점심을 빨리 먹어야 했기에 시장을 서둘러 둘러보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사람이 적은 것인지 아니면 시장을 열기에 너무 이른 시간인 것인지 사람이 별로 없고 문 닫은 곳도 많아 스산한 느낌이었다. 피부가 햇살에 구워지고 있어 다음 여정인 로컬커피로 가는 중 아무 곳이나 들어가 밥을 먹겠다는 마음으로 얼른 발걸음을 돌렸다. 가는 길에 맛있게 생긴 칼국수집이 있어 들깨수제비를 배 불리 먹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진한 충청도 사투리가 정겨웠다. 로컬커피로 가는 길은 적막한 시골 골목이었는데 카페 안은 북적였고, 분위기도 좋고, 커피 맛도 좋았다. 바리스타의 검게 탄 팔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나도 까맣게 태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뜨거운 몸을 식히기에 좋을 정도로 시원했다. 오랜 운전과 폭염 속 도보로 지쳐 책을 읽으며 깜박 단잠을 자기도 했다. 여기까지 7800보.
3. 웅진백제역사관과 송산리고분의 무령왕릉
카페를 나와 10분 남짓 걸어 원래 가려고 했던 무령왕릉에 도착했다. 웅진백제역사박물관과 송산리고분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역사관으로 들어가면 웅진을 도읍으로 머물렀던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그리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수촌리 세력의 이야기가 있었다. 공산성과 백제 장례문화를 볼 수 있는 정지산 유적, 금강 뱃길의 중심이었던 고미나루, 그리고 송산리 고분군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길을 따라가면 송산리 고분군 전시관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 안에는 굴식돌방무덤과 무령왕의 벽돌무덤 모형이 있고, 출토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무덤 모형에 들어갔는데 무령왕릉의 벽돌무덤은 책이 가득 꽂힌 책방 같은 느낌이었다. 밖으로 나와 화살표를 왕들의 묘로 갔는데 그날은 코로나로 입장료가 무료였다. 땡볕에 그늘 없는 길을 따라 입구가 밖으로 드러난 무덤 옆을 지나며 경주와는 다른 양식에 신기함을 느꼈다. 반대쪽 내려오는 길은 소나무 우거진 그늘이라 시원했다. 땀을 식히며 걷는 길, 겹겹이 거친 소나무 수피조차 예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4. 한옥마을 북스테이
근처 공주박물관도 가고 싶었는데 대체공휴일 다음날이라 휴관이어서 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코로나, 혹은 폭염으로 사람이 적고, 편의점 문도 열지 않아 목은 마르고, 몸은 뜨거웠다. 제민천쪽으로 가려다가 북스테이를 발견하고 구경이나 할까 하는 마음으로 갔는데 체온을 재니 뜨거운 태양 아래 계속 걸어 그런지 37.5도가 넘어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다.
제민천을 둘러본 다음 집으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이곳을 다시 찾았다. 집에 갈까 하고 네비게이션을 찍으니 두 시간 40분이 넘어 걸려(퇴근시간) 좀 더 있다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혹시나 체온이 내려갔을까 하고 한옥마을 북스테이에 다시 간 것이다. 다행히 36.7도여서 들어갔는데 이날 간 곳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한쪽에 식물을 주제로 책들이 꽂혀 있었고(내가 하루 종일 가지고 다니며 읽은 책도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였다는 사실), 시원한 에어컨을 켜고, 앉은뱅이책상에서 혼자 책을 읽으니 그곳이 바로 천국이었다. 겨울에 다시 가서 한옥에서 며칠 머물며 책 실컷 읽다 오고 싶다고 생각했다.
5. 제민천 주변 카페
유명하다는 제민천을 구경하려고 차를 공주 제일감리교회 옆에 세웠다. 코로나로 전시관이 휴관이라 밖에서 독립운동의 자취만 보면서 숙연함을 느꼈다. 바로 옆에 블루프린트 책방이 있었는데 입구를 못 찾아 헤매다 3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서점이 나왔다. 다락에서는 한 여성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달궈진 몸을 식히기에 좋은 시원한 그곳에서 한참동안 책들을 둘러보았는데 그동안 말로 듣던 책들을 몇 권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어떤 책을 살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사서 나왔다. 표지 그림이 예뻤고 뒤 집에 가져와 읽어 보니 너무 웃기고 재미있는 책이어서 잘 샀다 생각했다. 가가책방도 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 못 들어갔고, 예술가의 정원은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구경만 하고 그냥 나왔다. 반바지 차림에 하도 걸어다녔더니 자동차 시트가 다리에 쩍쩍 들러붙었다. 물티슈와 휴지로 계속 닦아도 소용이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은 물 먹은 솜처럼 기진해서인지 더 멀게 느껴졌지만 콩으로 클래식을 들으며 그 옛날 베토벤을 떠올렸다. 내일은 또 무얼 할까, 하며 단꿈을 꾸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코로나로 막내가 들어간 2주간의 서머스쿨(하루 종일 공부하는 학원 겸 독서실)이 단 이틀 하고 다음 날부터 휴강이라는 것이다. 다음 날 갈까 했던 공주, 그날 가지 않았으면 못갈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었다. 라디오에서 베토벤의 운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운명 4악장, 끝날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멜로디 같은 코로나. 어떤 긴 음악도 언젠가는 끝이 나듯 코로나도 운명이 다할 날이 있겠지.
집에 와 소금에 전 몸을 씻고 누우니 18552걸음. 남편도 제주 곶자왈 가서 그쯤 걸었다고 했다. 백제의 흔적을 가득 담은 공주, 정말 매력적인 도시였다.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볼 수 있을 때 꼭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