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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주 Sep 08. 2022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지 100일이 지났습니다


"어머니 잘 지내셨어요? 저 누군지 아시겠어요?"

"아유~ 참 아다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지!"

"전에 많이 본 얼굴이죠? 하하하."

"어떻게 여길 다 알고 왔어요? 여기서 일해요? "

 (몇 마디 오가지 않았는데 벌써 높임말을 쓰는 건 여전히 나를 못 알아보신다는 뜻)

"어머니 보고 싶어서 왔죠!"

"어머 그래요? 어머니가 여기 계신가 보네?"

"네! (양손을 어머니 얼굴로 뻗으며) 바로 여기 계시잖아요 하하하."

영문을 모르는 듯 갸웃하시더니 이내 질문공세를 이어가는 어머니.

"아니, 집이 이 근처예요?"

"아니오, 서울에 살아요."

"아 서울..."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자꾸 물으면 난처할까 봐 대강 넘기고 내 신상이나 거처가 궁금한 어머니의 질문에도 친절한 설명이라곤 일절 없이 나 편한 대로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호기롭게 질문공세를 펴던 어머니는 당신이 지금 계신 곳이 어딘지, 서울이 얼마나 먼 곳에 있는지 가늠할 길 없어 시선을 아득한 우주 어딘가에 던져놓고 어쩔 줄 모른다. 안타까움은 잠깐, 때를 놓칠세라 얼른 내가 궁금했던 것을 물으며 기세를 잡았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요."

 "어디 가려운 데는 없어요?"

 "네! 없어요, 가려운 데."

 "무릎은 안 아파요?"

 "네! 괜찮아요."

 "식사는 잘하세요? 반찬이 입에 맞으세요?"

 "네! 저야 뭐든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어요."

 "잠은 푹 주무셨어요?"'

 "네! 잘 자요."

 "같이 지내는 어르신들은 어떠세요?"

 "다들 잘해줘요."

 "눈썹은 왜 안 그리셨어요?"

 "눈썹? 아~이젠 안 그려요."


  숨 가쁘게 대답하던 어머니가 다시 기습공격에 나섰다.

 "아니 근데 어떻게 여길 다 알고 왔어요? 여기서 일해요?"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신 지 100일 아니, 보낸 지 100일이 지났다.

 100일이면 단군신화에선 곰이 사람이 될 수도 있었던 시간.

 그동안 3주에 한 번씩 4번의 면회를 했고 월 1회 제공되는 가정통신문과 급여제공기록지를 3번 받아 보았다.


 어머니가 계신 요양원은 부산에 있다.

 친정과 가깝고 믿을 수 있는 곳이다. 더욱이 내년엔 근처로 이사 갈 예정이라 코로나 시국만 끝나면 자주 면회가 가능하기에 당분간은 집에서 다니기 멀어도 다른 고민 없이 선택했다.


 입소하는 날, 부산행 기차 안에서 담당자와 문자메시지로 연락을 주고받던 중 몰랐던 사실을 전달받았다.

 pcr검사를 받고 입소하지만 만약에 있을 수도 있는 코로나 감염을 막기 위해 입소 후 3일간은 격리생활을 해야만 한다는 것. 맙소사!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도 벅찬데 혼자 격리되어 있어야 하다니! 그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입소결정을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중대 사안이었다. 덜컥 내려앉던 내 마음은 '차라리 뒤늦게 알게 되어 입소를 진행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에 이르러서야 하강을 멈추었다. 그럴 거면서 놀라긴, 걱정하긴, 안쓰러워하긴... 그렇게 스스로를 질타하다가도 '진짜 괜찮을까? 예상을 뛰어넘는 문제가 생기면 어쩌지?' 두려운 생각이 들어 입소하는 날까지도 내 마음은 뒤죽박죽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걱정했던 첫 3일간, 어머니는 격리실 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요양보호 선생님이 안내하는 대로  순순히 들어가길 무한 반복하며 잘 주무시고 잘 드시며 평안히 지냈다고 한다.

 3일 동안의 근황을 들은 나는 안심했고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연한 초록빛 싱그러운 봄날을 만끽했다.

 그리고 나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

 "어머니는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라고 물으면

 "네! 생각보다 너무 잘 지내고 계세요!"

 "네! 생각보다 잘 적응하셔서 너무 감사해요!"라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영원하기를 바랐던 나의 장밋빛 대답은 고작 일주일로 끝났다.

  첫 끗발이 개끗발...

  어머니 일에 이런 화투판 용어를 끌어다 쓴 것이 참으로 송구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듯 어머니가 요양원에 그리 쉽게 적응하기를 바란 내 불손한 마음엔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어쩌면 일주일이나마 평온했던 것이 기적일 수도 있겠다.


 요양원 입소 일주일 후 생활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어르신이 며칠은 새로운 환경을 탐색하시느라 조용히 계셨나 봅니다. 지난번에 보호자님과 통화한 후부터  행동이 급변하셨어요. '어머니가 위독해서 간병하러 가야하는데 왜 안 보내주냐' 하시며 문을 발로 차고 소

리 지르셨어요. 밤엔 잘 주무시고 식사도 잘하시는데 종일 지치지 않고 계속 그러셨어요. 또 이 방, 저 방 다니면서 다른 어르신들 물건을 다 당신 거라고 하면서 빼앗아 가세요. 다행히 다른 어르신들이 크게 동요하지는 않으세요. 서울말을 쓰시니 언성을 높여도 과격하게 들리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때로는 말리는 직원을 때리고 꼬집기도 할 만큼 노여워해서 잠깐 모시고 나가서 산책을 하기도 하고 분위기 전환을 해보는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어르신 건강에도 해로우니 약물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약물치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 어떻게 하고 계신지 보이는 것 같아요. 돌보시기 너무 힘들겠네요.. 약물은 어떤 건가요?"

 "신경안정제입니다. 분노를 조절하고 억제해서 일상생활을 안정적으로 하게 하는 거죠. 구토나 오심, 어지러움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 의사 선생님이 보시고 용량이나 투약일을 민감하게 처방하고 지켜보십니다. 참고로 협력병원 의사 선생님은 약물치료에 신중한 편입니다."

 "이미 감정조절을 위한 안정제를 조금 드시고 있는데 그걸로 안된다는 말씀이시죠?"

 "네. 지금 드시고 있는 걸로는 제어가 안 되는 상황이에요. 아마 다른 종류의 약을 처방받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다시 모시고 올 수 없으니 시설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선생님들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촉탁의사 선생님이 오셔서 보고 계시니 몇 주 더 지켜보고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네네.. 너무 힘드시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싸움을 잘 못했다.

 누가 당신에게 잘못하거나 서운하게 하면 상대방에겐 한마디도 못하고 늘 나에게 하소연했고 결국엔

 "난 그악스럽게 싸우고 그런 거 못해... 에잇, 내가 참고 말지."하고 툴툴 털어내곤 했다.

 그런데 치매가 심해지자 그렇게 피하던 싸움터의 선봉에 서서 이판사판 돌격대장도 서슴없이 도맡았다.

 센터에서 다른 할머니가 집에 가겠다고 하면 어머니가 나서서 왜 안 보내주냐고 요양보호 선생님에게 호통을 고, 옆의 어르신과 사소한 문제로 옥신각신하기도 고  그토록 좋아하던 내 친정엄마에게 욕설을 퍼부은 적도 있다.

 작고 노쇠한 사람이,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용을 쓰며 화를 내는 모습은 정말 측은하다.

 익숙한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의 싸움도 버거웠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속에 들어가 문밖출입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투쟁의 수위를 더욱 높여야 했으니 얼마나 힘겨웠을까...

이기적인 나는 이타적인 나와 투쟁하여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보내고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누구와 싸워 이겨야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어머니 입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시적인 면회가 허용되었고 다행히 한동안 허용 방침이 유지되었다. 그 사이 3주에 한 번씩 4번의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면회는 입소 후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가실 때와 변함없는 모습과 컨디션으로 30여분의 면회시간 동안 명랑하고 유쾌하게 대화를 주도하셨고, 헤어질 때도 나의 하트 손 인사에 환한 얼굴로 화답하며 너무나 쿨하게 돌아서 들어가셨다.  방금 순순히 보내버린 사람이 당신을 집으로 안내할 수 있는 길잡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정작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틈으로 어머니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혹시나 나랑 같이 집으로 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두 번째 면회는 약물치료가 시작된 지 5일이 지난날이었다.

 약물치료 후 다른 부작용 없이 적절히 감정 조절이 이루어져 돌보기도 한결 수월하고 프로그램 참여도도 높아 굉장히 성공적인 케이스가 되었다고 하셔서 저으기 안심하고 어머니를 만났다. 그런데 눈에 띄게 차분한 분위기의 어머니가 얼떨떨하게 나와 마주 앉았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아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산만할 정도로 질문하기에 바빴던 어머니는 내 질문에 간단하고 조용하게 대답을 마치고 어색해하셨다. 해외에 있는 남편과 통화연결을 하자 어느 순간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르고 높임말을 쓰며 동문서답하거나 무슨 말인지 모를 말씀을 끝맺지도 못하셨다.

 치매환자의 컨디션은 날마다, 시마다 여러 요인에 의해 달라지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이 약물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 약물 때문에 인지능력도 저하되는 건 아닐까 염려가 되어 여쭤보니 인지 프로그램에 더 안정적으로 참여하고 계시니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하셨다. 그러니 약물치료에 관해서는 선생님들께 맡긴 채 다시 3주를 지냈다.  

 그렇게 세 번째 면회를 했는데 아.. 지난번보다 더 생기를 잃어 무표정한 어머니를 만났다. 발음도 많이 어눌했다. 이쁜 파마머리가 잘려나갈까 봐 미용사님이 당분간 머리 손질을 하지 말자고 하셨다는데 오히려 내 보기엔 더 추레한 모습이어서 너무 속상했다. 남편과의 통화도 소통이 거의 불가능해서 일찌감치 동시 통역가를 자처하고 나섰지만 어머니 상태가 현저히 나빠진 것을 느끼는 남편의 무거운 숨결에 나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면회객들이 있어서 어머니와는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져야 했다.

 주말을 보내고 팀장님과 통화를 했다.  

 "우리 어머니가 아닌 것 같았어요."

 면회 때 받은 솔직한 느낌을 말씀드렸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아는데 마음이 안 좋다고...

 "그날은 특히 컨디션이 나쁘셨나 봐요. 그런데 확실히 어르신의 행동이 많이 느려지고 말씀도 눈에 띄게 줄었어요. 선생님들도 웃음을 유발하던 어르신 특유의 명랑한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고들 하시고요.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일상이 유지되고 있으니 의사 선생님께 약 용량을 줄이면 어떨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래도 선생님들 돌보기 어렵지 않도록 결정해 주세요."

 "네, 너무 염려 마세요."

 의사 선생님은 당분간 그대로 유지하자는 의견이어서 어머니는 약물 감량 없이 다시 3주를 보냈다.

 네 번째 면회 때는 어머니의 컨디션이 한결 좋아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매일이 다를 텐데 짧디 짧은 면회시간으로 어머니 상태를 판단하고 일희일비하는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면회를 다녀온 지 며칠 지났을 때 팀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약을 감량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배회나 문제행동의 빈도수는 늘어나 선생님들이 돌보기는 더 어려워졌지만 어머니 특유의 쾌활함을 되찾게 되어서 어려움을 감수하고 그 상태를 유지해보겠다고,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우면 다시 증량하더라도 아쉬움은 없도록 시도 중이라고.


 "고맙습니다!"


 정말이지 요양보호 선생님들께는 고맙다는 말씀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그리고 어머니 전 상서.

  어머니! 부디 '어머니 다움'을 잃지 말고 고마운 분들과 함께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 면회 때 반갑게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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