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주 Jun 21. 2023

시어머니 옷 입히기

치매도 육아처럼 28

 어릴 때, 마분지에 알록달록 인쇄된 종이인형을 가위로 초집중해서 오린 다음 친구들과 스토리를 만들어 가며 재밌게 놀곤 했다.

 종이옷이 나달 나달 해져도 정성껏 붙여 조심스레 입히는가 하면 연습장에 인형 실루엣을 잡고 원하는 드레스를 그려서 입히기도 했는데 깜빡 잊고 어깨에 뿔을 안 그린 채 오렸다가 낭패를 보는 일도 많았다. 그뿐인가! 목이 가녀린 종이인형은 몇 차례 옷을 갈아입히지 않았는데도 금방 찢어지거나 접혀 버려서 투명 테이프로 칭칭 감아 겨우 고개를 들게 해 줬던 기특한 장면도 기억난다. 아~~~ 그때의 속상함까지 스멀스멀 올라온다.ㅎㅎㅎ  




 "오늘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하늘색 원피스 어때요?"

 "아유 내가 그 색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어? 호호호."

 키 작은 어머니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다시 인형놀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 부지런히 활동하던 어머니가 집에만 계시면서 운동량이 현저히 줄게 되니 몸무게가 늘고 체형도 달라졌다. 내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55 사이즈가 채 안되던 어머니의 몸은 이사 올 즈음 66을 넘어 77로 향하고 있었고 그나마 상하의 사이즈도 서로 다른 기형적 몸매가 되어 버렸다.


 이사하면서 어머니 몰래 산더미 같은 옷을 정리하고도 장롱 속엔 옷이 가득 남아 있었다.

 세심하게 정리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대략 이 정도는 입을 수 있지 않을까 가늠했던 옷들도 막상 입혀보니 모두 작거나 꽉 끼어서 불편해 보였다. 신축성이 있는 스웨터나 품이 넉넉한 외투 정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새로 마련해야 했다. 당연히 속옷까지도.


 다행히 어머니와 나는 옷 고르는 취향이 비슷했다. 

 알록달록 현란한 무늬의 옷을 싫어하고 면이나 마 같은 천연섬유 소재의 옷을 좋아하는 점.

 그런데 할머니들이 입기 좋은 디자인의 옷은 대부분 우리 취향이 아니라는 점이 새로 옷을 사야 하는 시점에 큰 걸림돌이었다. 일단 어머니의 시선을 끌지 못하니 쇼핑몰을 뱅글뱅글 돌기만 할 뿐..

  한 번 시착이라도 해보자며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피팅룸으로 이끌어 보아도 키 작고 통통한 어머니 사이즈에 맞는 옷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어깨가 맞으면 품이 솔고 품을 맞추면 어깨뿐 아니라 네크라운드도 너무 헐렁하고, 소매길이나 상의길이는 염두에 둘 상황조차 아니었다. 어깨는 좁고 상체와 팔은 짧고 허리둘레는 큰 모델을 위한 사이즈는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 쩝...


 아쉬우나마 겨우 몇 가지 사서 돌아오긴 했는데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쇼핑 좋아하는 어머니와 휴일에 시간 보내기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원하는 옷이 없다는 문제뿐 아니라 점원에게 

 "나는 평생 S백화점에서만 옷을 샀어요. 여긴 좀... S백화점은 말이에요, 어쩌고 저쩌고.."

 끝없이 말씀하시니 점원은 옷을 사지도 않을 손님에게 친절하기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 아무도 만족하지 않을 쇼핑은 이제 그만! 


 그래도 어머니의 취향이나 시장 상황을 알 게 된 것은 소중한 성과였다. 

 얼마 후에 꾀를 내어서 아동복코너로 진격했다. 물론 어머니와 동반하지 않고.

 발육이 좋은 요즘 어린이를 위한 넉넉한 사이즈의 옷들은 소재도 좋고 성인옷과 유사한 디자인도 많아서 지나치게 귀염뽀짝한 무늬만 아니라면 선택의 폭이 꽤 넓었다.

 아동복 150이나 160 사이즈의 A라인 상의는 팔길이만 줄이면 맞춤복이나 다름없이 착착 맞았다. 아동복코너에는 이월상품 할인이벤트도 많아서 가격까지 저렴했다. 신세계!^^  

  아쉬운 점은 바지는 대상에서 제외다.  넓은 허리둘레와 밑위길이를 해결해 주는 사이즈를 아동복코너에서 찾는다는 게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ㅎㅎ 부인복코너에서 잘 늘어나는 고무줄바지를 골라 기장을 줄여드리면 되니 크게 까다롭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원피스는 아가씨들이 주로 이용하는 매장에서 박시한 스타일을 샀는데 길이가 좀 짧다 싶으면 치맛단에 레이스를 달아드렸다. 어머니의 소녀감성도 만족시키고 종아리도 드러나지 않아 아주 굿!^^ 


"나 예뻐? 난 뭐든지 잘 어울린다고! 호호호."  정말 뭘 입혀도 귀여운 어머니의 18번 대사^^


 계절마다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갖추어지자 이젠 잘 관리하는 것이 숙제가 되었다.

 다시 예전 몸매를 찾긴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이 옷 저 옷 껴입는 바람에 다시 갈아입히는 과정에서 땀이나 화장품이 묻으니 세탁하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어서 입을 수 없는 옷들은 당장 정리하고 필요한 옷만 여유롭게 수납해두고 싶었는데 바로 단행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가 옷장을 열어보고 상심하거나 의심할게 분명했기 때문에  센터에 가고 안 계실 때 한 두 벌씩 천천히 정리하며 줄여 나갔다.


 계절 옷은 따로 분류해서 상자에 수납하거나 트케이스에 넣어 메모를 붙여놓고 건드리지 말 것을 당부해 보았는데 밤새 다 풀어서 다시 뒤죽박죽 섞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하셨다.

 먼저 포기하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어쩌면 빨리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상책인 것 같다. 

 하지만 훗날 회심의 일격이 있었으니 그 습관을 이용해 심심해하는 어머니에게 일부러 옷을 마구 꺼내놓고 정리 일거리를 만들어 드렸던 것이다. ㅎㅎㅎ (자세한 이야기는 합가 후 에피소드에서 전해드리기로 약속!^^)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와 슬기로운 식(食) 생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