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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24. 2023

제일 싫었던 설거지가 나에게 준 선물들

삼겹살 숙주볶음

설거지... 다들 하고 사는 건데도 나는 이게 참 어려웠다.



엄마는 전라남도 보성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젊었을 적 만주에 가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오셨던 외할아버지는 보성에서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버셨고, 가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다고 한다.

"이걸로 좋은 옷 해입으소."

외할아버지는 간간이 외할머니에게 돈봉투를 내미셨던 스윗한 남편이셨다. 아이를 열 명인가 낳았지만 그 중 둘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내가 태어났을 땐 엄마는 8남매의 셋째였다. 집 안에는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아이들만 해도 수가 많았는데, 거기다 집 안에 일하는 사람들도 여러 명이 있었다.

일하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해도 살림이 워낙 크다보니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외할머니는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많이 시켰다고 들었다. 아들은 일을 시키기엔 너무 귀했고, 딸이 셋이 있었는데 예쁘고 운동을 잘 했던 첫째딸은 주로 집 밖에 있었고, 막내딸은 전체 팔남매 중의 막내로 일을 시키기에는 너무 아가였다. 그리고 첫째딸 바로 밑에 말을 잘 듣는 둘째딸 - 나의 엄마가 있었다.

힘든 기억이 많았던 듯 하다. 한옥의 구석방은 혼자 들어가기 무서웠는데,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그 곳 바닥도 엄마가 닦도록 엄하게 명했었다고 한다. 엄마는 어렸는데도 외할머니가 엄마 밑으로 줄줄이 낳은 남동생들을 업은 채 많은 집안일을 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8남매 모두를 서울로 유학 보냈다. 스무살이 된 엄마도 대학생이 되면서 서울로 유학을 갔다. 대학교에 가보니 서울의 여학생들은 손이 어찌나 고운지, 엄마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해서 두텁고 울퉁불퉁해진 자신의 손을 꺼내놓기가 민망했다.


내가 내 딸은 곱고 귀하게 키운다.


엄마는 나에게 그 어떤 손 쓰는 일도 시키지 않았다. 가사 도우미님이 오실 때나 안 오실 때나 집안일은 엄마가 통째로 다 감당했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샤워하고 책장을 넘기고 글씨를 쓸 때만 손을 사용했다. 그렇게 큰 내 손은 정말 예쁘고 고왔다. 손 모델 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자주 들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에 공부를 하면서 뚱뚱해지고 두터운 안경알 뒤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래도 나는 손이 예쁘니까.' 하는 일말의 자긍심을 붙들고 살았다. 외모 컴플렉스가 커질수록 나에게 있는 딱 하나 예쁜 곳 - 손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손마저 못생겨지면 나는 예쁜 데가 아무데도 없지 않을까... 두려웠다.

손을 조금만 써도 내 눈에는 손이 변하는 게 보여서 손을 쓰는 걸 점점 더 삼갔다.


두려움 속의 나는 인격적으로 저질이었다. 타인들의 마음이 어떨지를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몸살이 나서 누워 있어도 집안일을 한 톨도 거들지 않았고,

동생과 둘이 북경에서 살 때도 칭화대에 다니면서 아직 잘 모르는 중국어로 공학을 공부하며 죽을둥 살둥 버텨내고 있었던 동생에게 학교에서 돌아오면 설거지를 하게 했고,

런던으로 유학을 가서 하우스 쉐어(방 하나를 렌트하고 부엌과 화장실은 공유하는 것. 물가가 비싼 런던에서는 이런 형태의 렌트가 흔하다.)를 할 때도 닭고기나 카레를 만들어 먹고 난 그릇과 조리도구들을 싱크대에 놓아두고 돌아섰다.

친한 언니가 집으로 초대해서 밥을 만들어 주어도, 나는 밥만 쏙 먹고 설거지는 안한 채 고맙다 하고는 돌아갔다.


"인제... 해..."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을 때 엄마는 아직도 내 손에 물을 묻히기 싫은 마음을 힘겹게 붙들고 나지막이 나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서 설거지가 시작되었다.


남편과 삼시 세끼를 함께 한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설거지 양이 그렇게나 많을 줄 몰랐었다. 남편이 결혼 전에 요리를 했을 때는 집에 가사 도우미 분이 항상 계셔서 뒷정리를 감당했었고, 회사 직원들을 초대해서 요리를 해주었을 때도 식사를 마치고 나면 직원들이 설거지를 해놓고 갔었기 때문에, 뒷정리를 자신이 해본 적이 드물었다. 그래서 뒷정리에 대한 생각 없이 요리를 하니, 한 번 요리를 하고 나면 프라이펜, 냄비 여러 개, 요리하면서 사용한 그릇들, 기타 조리 도구들이 싱크대 위에 산처럼 쌓였다. 남편이 여기저기 온통 흘리면서 요리를 하는 통에, 요리하면서 사용한 모든 것을 다 닦아야 했다. 소금통, 후추통, 부엌 바닥, 벽면...

상하이에서 살았던 결혼 첫 일년 동안은 가사 도우미 분이 일주일에 세 번 오셔서 두 시간씩 도와주셨는데, 말이 없던 그 분이 한 번 마음먹고 나에게 다가와 물어온 적이 있었다.

"... 어떻게 식사하는데 설거지 감이 이토록 많이 나와요...?"

설거지를 해본 적도 없었던 나로서는 감당이 많이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정말로 많이 힘들다는 게 눈에 보였던 남편은 되도록 설거지감이 많이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면서 요리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얼마나 바득바득 미워했는지 모르겠다. 즐겁다가도 설거지를 시작할 때부터 설거지를 마친 후 설거지 모드에서 나올 때까지 걸리는 얼마간의 시간 동안 내 안에는 짜증과 원망이 가득했다. 매일 하는 설거지가 그토록 싫었으니, 이는 나의 행복 지수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주었다.

아 설거지는 정말 피곤해. 진빠져...

왜 같이 먹고 사는데 설거지를 나만 해야 하는거지?

내 손은 이제 설거지 하느라고 못생겨졌어. 난 아주 소중한 걸 빼앗기고 만 거야.

너무 싫다!!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설거지를 이만큼 했을 때 분명 나는 피곤함을 어느 정도 느낄 타이밍인데 그 날은 피곤하지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몸이 허약해 왔던 터라 피곤함에 예민한 편이다.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차이가 있는거지?

곧 나는 다른 날과 그 날이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내가 보통 설거지를 할 때는 설거지의 과정 전체를 보면서 끝점을 바라보고 해나갔다. 설거지 하는 내내 내가 한 설거지와 앞으로 해야할 설거지의 양을 끝없이 계산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설거지를 할 때는 항상 머리 한 켠으로 의미없는 딴생각을 했다. 전날 보았던 동영상, 들었던 노래, 기타 이런저런 잔상들...

그 날은 내가 앞으로 설거지를 얼만큼 더 해야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딴생각 없이, 차분한 호흡으로 그저 지금 씻는 그릇 하나, 또 그릇 하나, 또 다음 그릇 하나 하는 식으로 그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하니 에너지가 빨려나가는 느낌이 없었다.

말 그대로, '현재에 있었다'.

그 후 다른 일을 할 때에도 그저 그 순간에 집중하려고 해보았다. 되도록 딴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 일이 1부터 10까지 줄줄이 있더라도 1을 할 때는 차분히 1에만 온 마음을 쏟아 보았다. 확실히 체력 소모가 적었다. 오히려 힘이 좀 생기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옆에서 나를 보던 남편이 요즘들어 체력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체력이 약했던 나에게 설거지로부터 얻은 이 깨달음은 굉장히 큰 선물이었다.


설거지를 내가 도맡아 했던 건 남편의 설거지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남편은 '얼굴에 로션을 바르듯' 손에 그 어떤 힘도 주지 않은 상태로 그릇을 닦았다. 남편이 설거지한 그릇에는 음식물 찌꺼기들과 잔여 세제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그 그릇에는 음식을 올려서 먹을 수가 없었다.

나의 설거지 기준을 자신에게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남편의 말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거지를 하는 내내 마음 속으로 남편을 원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설거지를 하면서 피곤했던 건 설거지를 많이 한 탓도 있겠지만, 남편을 원망하느라고 내 마음이 시달려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는 게 뭘까. 누구나 좋은 상황에서는 다 좋다.

힘들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자꾸 마음이 닫힐 때, 의지적으로 마음의 문을 밀어 열어서 상대방이 왜 그랬을지를 이해해 보려고 하는 게 사랑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설거지를 통해 남편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설거지로부터 받은 두번째 선물이다.

남편은 남자는 부엌에 얼씬 거리지도 말아야 한다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요즘엔 그런 가정이 적어졌지만, 남편은 60년대생이니까. 그래서 집안일, 특히 부엌일에 가까이 다가가는 게 자신의 문화적 배경과 습관을 꺾는 일이었다. (요리도 부엌일이긴 하지만, 창조적인 일이니 설거지와는 조금 다르다.)

화장실 청소, 바닥 청소, 빨래,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등등, 대부분의 집안일을 내가 했지만, 남편이 끊임없이 자기 눈에 보이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습하디 습한 제주도에 살았던 5년 동안 온 집안과 옷들을 쉬지않고 살피면서 습해지거나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제습기 세 대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물을 갈아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는데, 그 부분을 남편이 알아서 감당해 주었기 때문에 집을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힘들어할 때는 자신이 하는 설거지를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 설거지까지는 못하더라도 물질이라도 해두었다.

분명한 건, 남편은 '내가 하기 싫으니 (또는 할 수 없으니) 집안일을 너가 다해라'는 식이었던 적은 없었다는 거였다.

내가 자신의 설거지에 문제가 있다고 했을 때, 그리고 설거지가 힘들다고 했을 때,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항상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임해 주었던 남편의 모습과는 다르게, 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같이 감당해 주려고 하지 않았을까.... 오랫동안 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마음이 힘들었다.

아... 그 때는 그게 남편의 최선이었구나. 이유야 달랐겠지만, 나 또한 설거지가 두려워 다른 사람이 하게끔 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신을 변화시켜서 설거지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나의 힘으로 나 자신의 생활을 이끌어 가는 힘이 생겨나고 있음을 느낀다.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가 일체 감당해 주었던 설거지, 청소, 옷 관리 등을 이제는 나 스스로 하면서, 나도 나의 생활을 얼마든지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 나가서 무언가 '훌륭한' 일을 하라고 하면서 집안일은 가치 없는 것처럼 말하곤 했었다. 막상 해보니, 설거지를 비롯한 집안일은 나 자신과 나의 남편과 우리가 사는 집에게 끊임없이 나의 에너지를 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훌륭한 일이었다. 겉으로는 단순하고 별 의미없어 보였던 집안일을 이제는 참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게 아무것도 안 하면서 손을 예쁘게 간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있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설거지가 나에게 준 세번째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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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삼겹살 숙주볶음을 만들어 먹었다.

간장 양념을 할까 고추장 양념을 할까 고민하다, 고추장 양념으로.

고기가 딱딱해지면 먹기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통삼겹살을 수육을 한 후 아주 얇게 썰었다.

삼겹살, 파, 마늘, 깻잎, 느타리버섯, 그리고 마지막에 숙주.

남편이 이렇게 만드니 고기가 부드럽다며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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