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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Jan 08. 2024

돈통

감자달걀 샐러드

어릴 때부터 우리집 현관 앞에는 나무로 된 조그만 항아리 모양의 돈통이 놓여져 있었다.


돈통을 놓아두는 건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비롯한 8남매를 키우면서 쓰시던 방식이라고 한다. 돈이 필요하면 알아서 돈통에서 가져가면 되는 구조이다 보니 남매간에 돈을 놓고 싸우는 경우가 없었다고 들었다. 누군가가 욕심이 나서 돈통의 돈을 다 가져가 버릴 수도 있지 않나 싶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막상 어릴 때부터 돈통을 놓고 사는 데에 익숙하다 보면, 돈통의 돈을 취해야겠다는 욕심이 들지 않는다. 실상 돈통의 돈이 내 것인데 뭐하러 굳이 다른 곳에 숨겨둔단 말인가.


엄마도 나와 동생을 키우면서 외할아버지가 하셨던대로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돈통을 놓아 두었다. 장을 보고 동전 잔돈이 생기면 으레 돈통에 넣어 두셨고, 간간이 지폐도 챙겨서 넣어 두셨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나는 문방구에서 사야할 학교 준비물이 있으면 돈통에서 돈을 적당히 꺼내 가서 샀다. 아침에 학교 갈 때 꼭 돈통을 열고 오백원짜리 동전을 하나 바지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학교가 끝나면 그걸로 학교 앞 슈퍼에서 쿠앤크 아이스크림을 사먹기 위해서다. 중학생 때는 돈통에 있는 돈을 들고 가서 마이클 잭슨 CD 도 사고, 타이타닉 사진이 인쇄된 책받침도 샀다.


그렇게 돈통을 옆에 두고 자라니, 돈에 대해 두려움도 부족함도 없었던 동시에 욕심도 없었다. 또한 돈을 자세히 관찰하거나 관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 손이 쥐어진 돈에 대해 애착도 없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룸메이트 친구와 침대에 걸터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친구가 말했다.

"난 초봉 00원이 목표야."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가 말했던 그 액수가 열심히 노력하면 이룰 수도 있는, 상당히 합리적인 숫자였던 것 같은데, 당시의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었다.

돈이 나타내는 숫자에 대해 감각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엄청나게 큰 숫자만 상상했다.


돌아보면 참 앞뒤가 안 맞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던 건 미래에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학자로 이름을 날리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공부했다.

그런데 정작 그 목표인 돈 자체에 대해서는 신기할 정도로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알고 싶어진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강점, 약점, 성장배경, 미래에 대한 꿈들, 기뻤던 기억, 슬펐던 기억... 알 수 있는 건 뭐든 다 알고 싶다.

돈을 좋아하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 아닐까. 돈이 언제 어디로 흘렀었는지, 돈의 특성이 어떤지... 더 더 많이 알고 싶고 느껴보고 싶지 않을까.


어릴 때부터 부자로 살고 싶다고 당연한 듯 말해 왔으면서도, 살짝 용기를 내서 진짜 나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나는 돈을 많이 가지고 싶은 마음은 애초에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실상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다.


오늘 아침에 마트에 가서 야채와 굴 등을 사면서 2만원 정도를 썼다.

2만원을 지출하는 지금의 나의 마음이, 어릴 때 돈통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서 쿠앤크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던 무심함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는 돈통이 나무로 만들어진 예쁜 통이었고, 지금의 돈통은 은행계좌라는 것 외에는 내가 느끼는 데 있어 큰 차이가 없다.

소중한 우리 부부의 식사를 위한 재료들을 얻기 위해, 소중한 우리의 2만원을 보내주고 있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 무디다. 머리로는 감사한데, 가슴에는 별 감정이 없다.


돈과의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가져왔던 돈에 대한 마음이 이제는 나에게 별로 편안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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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엔 감자와 달걀을 넣은 샐러드를 만들었다.

마요네즈를 만든다.

믹서기에 달걀 노른자 2개와 머스타드와 레몬즙과 소금, 후추, 그리고 올리브유 1티스푼을 넣고 간다.

노란 노른자의 색깔이 차츰 하얀빛을 띄어가면 올리브유를 아주 살살 더 부어주면서 계속 간다. (이 때 올리브유를 갑자기 많이 넣으면 마요네즈의 꾸덕함이 안 만들어진다.)

익혀서 깍둑 썰기를 한 감자와 완숙해서 썰은 달걀과 건 블루베리 + 마요네즈 + 설탕(취향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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