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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14. 2023

노예의 마음을 가진 자

고등어조림

"어릴 때 맞으면서 공부했던 사람 손들기!"

이십 대 때 참석했던 고등학교 동문회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다들 누가 손을 들었는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나도 손을 들면서 또 어떤 사람들이 손을 들었나 둘러 보았다.

놀라웠다. 손을 든 사람들은 굉장히 비슷한 모습들을 하고 있어서 굳이 손을 들지 않아도 대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소극적이고, 자신없어 보이고, 부정적인 면이 많아 보였다. 시험을 여러 차례 보고 합격해야 들어갈 수 있었던 고등학교여서 동문회에 참석했던 이들은 너나 할것 없이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 각자 하는 일에서 어느 정도 좋은 성과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탁월한 성과를 보이는 사람은 드물었다.


내가 맞기 시작한 건 다섯 살 때였다.

자위를 했는데, 엄마가 하지마 하지마 해도 계속 했었나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던 엄마는 하루 날을 잡아 막대기로 나를 엄청나게 때리고는 옷을 모두 벗겨 문 밖으로 내몰고 문을 잠가버렸다. 몇 시쯤 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칠흑같이 어두웠다.

공포를 느꼈다. 맞을 때도 무서웠고,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발가벗겨져 집 밖에 혼자 있는 것도 무서웠다. 온 몸이 오들오들 떨렸는데, 아파서 떨리는 건지 무서워서 떨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벗은 채로 집 밖에 있자니 수치심도 느꼈다.

거절감도 느꼈다. 잘못하면 이렇게 버림받는 거구나 하는 충격적인 깨달음..

죄책감도 느꼈다. 맞으면서 피부로 느끼는 고통이 죄책감이라는 느낌이구나.

이 날로부터 몇 십년이 지나 알게 된 거지만, 이 날 배운 가장 큰 레슨은 다름아닌 이거였다.


...... 나는 그런 학대를 받을만한 가치의 사람이라는 것.



아하 때리니까 말을 듣는구나 라고 생각해서였을까. 그 날부터 엄마는 나를 때리면서 길렀다. 손바닥 몇 대 하는 식이 아닌, 냅다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마지막 코스는 화장실로 데려가서 머리채를 잡고 미친듯이 흔들어 대는 거였는데, 이걸 받고 나면 너무 아프고 어지러워서 화장실 바닥에 잠시 누워 있곤 했다. 화장실 바닥에 수북이 떨어진 나의 뜯겨진 머리카락들이 누운 내 몸에 엉겨붙었다. 수 년을 그렇게 맞다보니, 맞고 나면 오히려 기분이 편안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를 잘 키우는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자라는 줄 알았다. 다들 집에서는 그렇게 하지만, 그것에 대해 꺼내놓고 말하기는 불편한 어떤 부분이 모두에게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너는 이토록 사랑받고 사는데 왜 그렇게 자존감이 낮니..."

엄마가 안타까운 듯 말했던 적이 있었다. 엄마는 아이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키우더라도, 때리면서 키우면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걸 몰랐나보다.


마지막으로 맞은 건 스물 한살 때였다.

엄마가 대학생인 내가 동생 공부를 잘 가르치지 않는다고 때릴 때 처음으로 분노가 폭발했다. 나의 모든 세포가 폭발해 버릴 듯이 부들부들 떨면서 엄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다시는 내 몸에 손대지 마세요."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적잖이 놀란 듯 했다. 그 후로는 때리는 일이 없었다.


법학과에 진학한 나는 사법 고시를 2년 정도 준비하다 그만두었다. 주로 공부를 안 한다고 맞아 왔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게 뼈저리게 싫기도 했고, 때려가면서 나를 밀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도무지 잘 되지도 않았다. 그 후로 내가 시도했던 모든 것들을 그렇게 그만두었다. 나 혼자서는 어떤 것도 해나갈 힘이 없었다.

나는 노예의 마음을 가진 자였다.


재미있는 건, 내가 왜 그렇게 하는 것마다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는 데에 이십년이 걸렸다는 거다. 그 이십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못났다고 탓해왔다.


이렇게 자라난 나와는 반대로,

남편은 평생 어머님으로부터 맞아보기는 커녕 혼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남편이 집안의 가보인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조차 어머님은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았으면서도 남편을 탓하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모든 것이 자율적이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 하고,

무언가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면 -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딱 하고,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으면 - 이거 싫다고 분명히 표현하고,

관계들 속에서 자신의 마음도 중요시하고 타인의 마음도 흔쾌히 배려한다.

남편도 두려움이나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회복력이 좋다.

원망을 담아두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억지스럽고 불편한 나와는 달리, 남편이 하는 모든 것은 자연스럽다.


남편은 노예같은 나를 이해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나를 사랑으로 품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노예의 마음을 가진 내가 자유로운 사람은 이렇구나 라는 걸 가까이서 보면서 함께한다는 게, 정말로 쉽지 않은 여정이지만, 나에게는 분명 큰 기회이자 선물이다.


때때로 죄책감의 늪에 빠져들어가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중에 남편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내가 왜 그랬을지 나 자신에 대해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가져 보라고.

내가 인지한 상황이 진실인 건지, 일부만 보고 판단하고 있는 건 아닌지도 잘 살펴보라고.


나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잘 느끼듯, 타인에 대한 원망도 잘 느낀다. 죄책감과 원망은 둘이서 짝꿍인가보다.

나는 내 삶을 행복하게 할지 힘들게 할지에 대한 주도권이 타인에게 있다고 느끼는 듯 하다.

그 때도 남편의 따스한 목소리가 들린다.

타인으로 인해 힘들 때, 타인을 깊이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선택하면 원망하는 데서 느끼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오늘은 엄마가 자주 해주시던 고등어 조림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고등어 조림 레시피와는 좀 다르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보았다.


일단 고추 기름을 냈다.

프라이펜에 파와 편으로 썬 마늘을 넣고 익히다가,

간장, 까나리 액젓, 멸치 액젓을 프라이펜 바닥에 넣고 잠시 끓인 후 파 마늘과 섞었다.

마늘을 두 조각 정도 으깨서 넣어 주었다.

된장과 고추장을 넣고 같이 볶다가, 설탕과 조청을 좀 넣고 같이 볶았다.

약불로 줄인 후 고추가루를 넣고 같이 볶았다.

코리엔더(고수 씨)를 좀 으깨서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물을 붓고 썰어둔 무를 넣고 같이 끓였다.

30분쯤 끓이고 나서 불을 끄고 한두 시간 볼 일을 보고 와서 고등어와 양파 애호박 청량고추를 넣었다.

간을 본 후 소금을 좀 넣어주었다.


좀 더 졸여 주었으면 더 맛있었을 것 같다. 오늘은 볼 일을 보고 왔더니 배가 고파서 고등어가 익자마자 먹었더니 재료에 간이 좀 덜 베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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