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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15. 2023

황야가 된 꿈의 발원지

무생채

지금은 그 어떤 꿈에도 '격' 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꿈을 가져 보려 하면 두려운 마음이 성큼 들어와 마음 한 켠에 자리잡는다.


다섯 살 때였나.

방에서 혼자 앉아 나이팅게일의 위인전을 읽고는 큰 감명을 받았다. 전쟁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되어주고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의료 체계를 개선시키기까지 하다니! 나이팅게일이 등불을 들고 병원을 돌아다니며 아픈 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내가 등불을 들고 환자를 찾아가는 상상을 했다. 오오 이거 너무 멋진걸.

설레임을 가득 안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태어나 처음으로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기쁨을 느껴서, 한시라도 빨리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다.

"엄마! 나 간호사가 되고 싶어!!!"


내 말을 들은 엄마의 얼굴은 표독스럽게 일그러졌다. 옆에서 수건을 개고 계시던 이모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나에게 고개를 절래절래 해보이면서 눈치를 주었다.

"그래! 너는 간호사나 해라! 간호사 해!"

엄마는 경멸과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박차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시의 엄마는 간호사 라는 직업이 낮은 계층이라고 여겼었나보다.

"어서 가서 잘못했다고 해..."

이모님이 나에게 속삭였다.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잠시 품었던 꿈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어요... 간호사 안 할게요.


아 꿈에는 하이 클라스가 있고 낮은 클라스가 있는 거구나.

꿈을 잘못 가지면 내가 못난 사람이 되는 거구나. 엄마가 화가 나는 거구나.


내 꿈은 의사로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땐 엄마가 만족스러운 수긍을 했던 것이다.


그 후로는 꿈을 가져보려 할 때마다, 꿈이 주는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느낄까봐 두려웠다.

'엄마가 탐탁치 않아 하지는 않을까'

'이게 혹시 격이 낮은 꿈은 아닐까'


성장기 내내 엄마가 나에게 원하는 걸 나의 꿈으로 잡고 살았다.

뉴스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라는 흑인 여성이 미국 국무장관이 되어 무언가 중대한 발표를 했다. 엄마는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내 꿈은 장관이었다.

어느 여성 법관이 지적이고 당당하게 법복을 입고 재판석에 앉아 위엄있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내 꿈은 법관이었다.

잡지를 보다가 고급스럽고 아름답게 꾸며진 어느 집의 사진들을 보고 엄마는 언젠가 내가 그런 집에 살기를 원했다. 내 꿈은 그 집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 내 생각은 버려 버리고 엄마의 안목과 생각에 의지했고,

한편으로는 엄마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서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기도 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엄마가 주었던 꿈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맞으면서 노예처럼 성장한 나는 꿈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가 없었다. 엄마가 나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느끼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성에 안 차는 딸'이라는 거.


그렇지만 딱 하나. 엄마가 심어준 꿈이 소중하게 자라 이루어진 것이 있다.

"너의 남편이 너를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으면 좋겠구나."

"둘이 마음이 잘 맞아서 하나가 되는 기쁨을 황홀하게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구나."

"너의 남편이 너를 진정으로 귀히 여기면 좋겠구나."

자신의 결혼생활에 많은 불만족을 느꼈던 엄마는 평생에 걸쳐 나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온 마음을 다해 빌어 주었다.


엄마. 이건 이루어진 거 같애.


지금의 남편을 엄마에게 데려갔을 때 엄마는 남편이 나와 나이 차이가 많았음에도 크게 기뻐해 주었다.

이 사람과는 내 딸이 행복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가 꿈꿔준 행복한 부부관계는 만들어 가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는데, 그 동안 엄마는 세상을 떠나 버렸다. 엄마는 엄마가 나를 위해 꾸어준 이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꾸는 나의 꿈.... 을 꾸려니 쉽지가 않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나이팅게일 위인전을 보고 느꼈던 자연스러운 울림이 어디에서 또 울리는지 느껴보자. 덮어 두었던 내 마음을 열고 다시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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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바람이 불면 무생채를 만든다. 입동 지난 기념으로 오랜만에 무생채를 만들었다.

무우가 맛있어야 무생채가 맛있는 것 같다.


무우를 얇게 채썰고

소금 설탕을 뿌려 놓고 30분쯤 기다렸다가 물을 좀 빼준다. (사실 물을 안 빼도 물 자체가 맛있는데, 나는 간이 싱거워지는 게 싫어서 물을 좀 빼고 사용한다.)

고추가루, 액젓, 간장, 식초를 넣고 비벼준다.

간을 보며 필요한 재료를 더 넣어준다. 같은 재료라도 비율에 따라서 사람마다 내는 맛이 천차만별이다.

파를 채썰어서 같이 비벼준다.


막 만들었을 때는

'왜 확 맛있지가 않을까. 간은 맞는 것 같은데..' 했었는데,

이틀이 지나서 좀 익혀지고 나서 맛을 다시 보니 눈이 확 떠지게 맛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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