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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정 Dec 26. 2023

3분이 가져다준 자유

- 젖은 머리를 말리는 3분의 시간.

나는 귀가 얇아 내 귀를 스쳐 지나가는 말에 꽂혀 그 말을 고집스레 붙잡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올해, 그  맹신 하나 털어내고는 홀가분해진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몇 년 전 아이의 알레르기가 심해져서 약을 잘 짓는다는 한의원을 소개받아 방문하게 되었다. 한 눈에도 경험 많으신 듯 보이는 한의사 선생님의 말들이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얇은 내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와 꽂히고 있었다. 아이의 진료를 보러 간 김에 장기간 소화불량으로 애를 먹고 있던 나까지 진맥을 하였다.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주셨는데 유독 "머리 감은 후에 머리카락 꼭 잘 말려라"는 말에 내 마음이 묶여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를 잘 안 말리고 젖은 채로 밖에 나가 찬바람 쐤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려 고생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생했던 감기의 원인이 젖은 머리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집착은 당연한 순서였다.


머리를 다 말리지 않은 상태로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남들이 보기엔 우스운 이 맹신은 몇 년간 내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한 믿음 때문인지 아주 조금만 머리카락을 안 말려도 어김없이 감기가 찾아왔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머리를 말리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확신은 강해졌다. 외출할 때마다 시간을 체크해야 하는 또 다른 강박이 생겨났다. 외출하는 시간을 계산해 본 후 아침 일찍 나가야 하면 전날 저녁에 미리 머리를 감는다. 저녁에 감으면 머리를 다 말려야 잠들 수 있으니 또 시간을 체크해서 잠자는 시간보다 전에 머리를 감아야 했고 저녁에 못 감으면 한 시간 이상은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감았다. 드라이기가 있어 쉽게 머리를 말릴 수 있음에도 이런 집요한 과정들이 계속되었고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 어디 나뿐인가.. 딸아이의 긴 머리카락을 바짝 말려주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한 가지 생각에 매몰되면 얼마나 어리석어지는지 느끼면서도 내 머릿속의 "젖은 머리를 다 말려야 나갈 수 있어!" 강박은 나를 몇 년간이나 옭아매고 있었다.


장마철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딸아이와 함께 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코로나로 몇 년을 못 가다가 오랜만에 탕목욕을 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목욕탕을 향했다. 비 오는 날 젖은 머리로 돌아왔다간 지독한 감기라는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드리이어 기계에 사용할 동전을 잔뜩 챙겼다. 느긋하게 목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러 드라이 앞에 섰다. 100원에 3분간 드라이어가 작동한다는 안내문을 보고는 챙겨 온 100원짜리 동전 여러 개를 쌓아두고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드라이어 작동이 채 끝나기 전에 딸아이의 머리카락이 다 말랐다. 다음은 내 차례. 3분을 채워 말리니 내 머리카락도 바짝 말랐다. 머리카락을 다 말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3분이었다.


지금까지 머리 말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마도 체감상 10분은 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어림짐작 할 뿐이었다. 그런데 고작 3분이라니. 3분이면 충분했다니. 목욕탕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짧은 시간을 몰랐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심하기도 하고 왜 나는 스트레스였던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젖은 머리에 대한 집착에서 해방된 기쁨이 컸다. 


3분만 확보하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아침에 3분만 일찍 일어나기만 하면 어떤 이른 외출도 문제없었다. 자기 전 3분만 일찍 감으면 젖은 머리를 바짝 말려서 잠들 수 있었다. 아이 머리를 말리는 데도 3분이면 족하니 머리 말리는 것이 더 이상 귀찮지 않았다. 핸드폰 만지작 거리면 순식간에 없어져버리는 그 3분이면 자유로워졌으니 스스로 발견한 이 위대한 발견이 새로운 행성의 발견보다 내게는 의미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정한 나만의 틀과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람이었다. 그 생각에 매몰되어 힘겨워하느라 해결방법을 찾지도 못하고 지내왔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한 가지만 깨우치면 되는 데 말이다. 이 작은 사건으로 강박을 버리고 자유를 얻는 법을 배웠다. 매사가 매어 있으면 매어 있을수록 옭아매는 것들이 더 생겨난다. 하지만 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고 해방시켜 주면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가 열린다. 하나의 강박을 털어버리니 그 이상의 자유가 찾아왔다. 더 많이 열고, 열고, 열어버려야겠다. 더 큰 자유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싶어 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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