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함다행 Dec 12. 2022

나의 삶은 오늘도 충분히 예쁘다.

결국 나는 나를 사랑한다.

완벽한 허상

아마 중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잡지를 보면서 인테리어가 잘되어있는 집을 보았다.

화이트에 깔끔한 하얀 타일 바닥의 차가움을 상쇄시켜줄 폭신한 털 러그와 우드 다리의 심플한 의자가 있었다. 그 위에는 예쁜 색감의 비비드한 쿠션이 포인트를 주고 있었고 옆에 통창은 하늘거리는 시폰 커튼이 걸려있었다.

사진을 보며 나중에 내가 독립하면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예쁜 인테리어가 된 집에서 우아하게 커피 한잔할 여유를 가진 그런 삶을 살겠다고 말이다. 중학교 시절 내 방은 엉망이었다. 책상이 140센티미터짜리 사무용 책상이었는데 거기에 딱 책 한 권 자리만 빼고 어지러웠다. 책과 공책, 그리고 머리빗, 준비물, 자료 등등이 다 올라와 있는 그런 책상이었다. 정리 정돈이 안 되는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완벽하게 세팅된 환경에 내가 적응해나갈 것이라 착각했었다.      


삶은 상상과 달랐다.

드디어 결혼해서 내 집으로 독립했다. 내가 원하던 방식대로 살 수 있겠다 싶어 꿈에 부풀었다. 침대를 사고, 침대의 베딩을 아주 맘에 드는 것으로 장만을 했다. 베게 속통도 3개를 준비해서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침대를 세팅했다. 커튼도 화이트로 예쁘게 달았다. 하얀 시폰의 속 커튼과 백 아이보리의 예쁜 겉 커튼도 달았다. 식탁에는 센터 피스를 올려놓고 식탁 매트와 테이블보를 깔았다.

잡지에서, 사진에서는 너무너무 예쁘고 완벽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 집에 있으니 완벽하지 않았다. 푹신한 베개는 두통을 유발했고, 매일 아침 바닥에 떨어진 베개들을 다시 정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녔다. 두툼한 이불을 매일 터는 것도 힘이 들었고, 그 이불을 예쁘게 접어서 정리해 놓는 건 귀찮았다. 심지어 그 이불이 틀어질까 봐 낮에 눕지 못하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벌어졌다.

  하얗게 뽀얀 커튼은 쉽게 먼지가 쌓였고, 아침에 커튼을 걷을 때 먼지들이 폴폴 날리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난 먼지 알레르기가 심했다. 면 소재의 커튼을 조금만 오래 빨지 않으면 커튼을 만질 때마다 눈물 쏙 빠지게 재채기가 나왔다.

 식탁의 센터 피스는 쉽게 시들었다. 거기에 식탁 매트는 매일매일 빨아야 했으며 테이블보의 얼룩은 눈에 거슬렸다. 그 얼룩을 지우자니 테이블보를 여러 개 장만해야 했고, 그걸 관리하는 것도 일이었다. 음식을 자주 흘리는 나의 습관은 매트 관리를 더 까다롭게 만들었다. 매번 식사하고 빨고, 말아서 정리하고, 다시 꺼내서 세팅하는 그 과정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였다.     

 

점점 변하다.

결국 현실과 타협했다. 베개는 딱 한 개씩만 놓았다. 그것도 두통 때문에 경추 베개를 사서 쓰기 시작했다. 예쁜 베게 커버는 버렸다. 매트리스 커버는 접어서 정리해야 하는 커버가 아닌 고무줄 커버를 쓰기 시작했고, 남편과 추위에 대한 느낌이 달라서 결국 이불도 각각 썼다. 예쁘게 세트로 맞춰진 침대는 이제 사라졌다.

식탁은 유리를 깔았다. 센터 피스는 치워지고 식탁 매트도 결국 버렸다. 예쁜 세팅은 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릇의 어울림보다는 꺼내기 편한 그릇을 썼다. 식탁 위는 통일되지 않은 그릇들이 동시에 올라왔다.

커튼은 먼지가 잘 안 붙는 재질만 쓰기 시작했다. 따스해 보이고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비싸게 맞추었던 벨벳 커튼은 무겁고, 자주 빨아야 했기에 장롱 속에서 꺼내지 않았다. 대신 시폰 커튼, 합성 섬유로 되어서 먼지가 많이 안 붙는 커튼들을 주로 썼다. 색상은 당연히 말할 것 없이 먼지 티가 안 나는 색상을 쓰곤 했다.

어느 순간 보니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모든 구석구석 주인의 정성이 들어가서 꾸민 듯, 안 꾸민 듯 정교하게 계산된 그런 집이 아니게 되었다. 어느새 내 집은 너무나 평범한, 생활감이 가득한 공간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그 날은 슬펐다. 예쁜 집에서 예쁘게 살고 싶다는 나의 꿈이 실패한 것 같아서 괜히 울적했다.    

 

나는 선택했다.

 울적함이 쉽게 가시지 않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느 날 한 인테리어 블로거의 글을 읽었다. 그 블로거가 인터뷰하듯 팬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글이었다. 거기에 누군가가 내가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블로거님 집은 늘 항상 저렇게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나요? 아이도 키우시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죠? ”

그 질문에 블로거는 웃으며 답했다

“저도 사진 찍는 곳 바깥은 다른 집과 다르지 않습니다. ”

그러면서 사진 찍기 전 모습과 정리가 다 된 사진 찍을 준비가 된 상태의 차이를 보여주셨다. 그 사진 속 책상의 모습은 머그컵과 머리핀과 여러 가지가 함께 올라가 있는 내 책상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 지금의 우리 집은 인테리어보다 편안함을 선택한 결과구나.‘

저분은 사진을 찍기 위해 책상을 치우고, 그 옆의 기타와 아이의 가방, 그리고 책장에 올라가 있는 자질구레한 물건들도 다 치우고 사진 찍을 세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내버려 두고 신경 안 쓰는 것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예뻤다.

인테리어가 망가지는 상황에 대해 실망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완벽하게, 예쁘게, 잡지에 나올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착각이 있었다. 힘들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편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삶을 내팽개치는 행위처럼 생각했었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본 현실은 아녔다. 인테리어보다 편안함이 더 소중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예쁜 침대를 보다 두통이 없는 경추 베개를 선택했다. 완벽하게 세팅된 침대 보다 원할 때 언제든 누울 수 있는 침대를 선택했다. 각자의 취향 역시 소중하기에 세트 된 이불이 아닌 두 가지 이불이 동시에 침대에 있는 것을 선택했다. 난 나의 삶을 너무너무 사랑했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한 선택임을 깨닫고 나니 우울감이 사라졌다. 엉망진창인 집이 너무 소중하고 예뻤다. 짝이 안 맞는 침구도, 먼지가 잘 안 붙는 재질의 커튼도, 센터 피스가 없는 식탁도 다 예뻤다. 엉망이 되어 버린 인테리어가 내 삶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증거가 아니라 나를 너무나 소중하게 아껴준 증거였다.

결국 나의 삶은 오늘도 너무너무 예뻤다.

작가의 이전글 나밖에 들어가지 않는 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