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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Dec 15. 2021

[인도에서 만난 아버지]

 그 개가 닮은 사람


  인도에 가면 개들이 참 많다. 사람도 많고 소도 많고 그냥 뭐든 열배 스무배 많지만 개도 참 많다.

  인도에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느 골목길이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같은 산책을 할 수는 없다. 새들의 낮은 지저귐,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안부를 묻듯이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 고요한 물결, 이런 거 없다.


  1루피를 적선할 때까지 따라오는 소녀, 다리가 아파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릭샤왈라, 싼 숙소가 있다며 계속 사진을 보여주는 호객꾼, 멀쩡한 신발에 똥을 묻히고 너 신발 더러워졌으니 내가 닦아줄게, 돈 내 하는 귀여운 사기꾼, 온갖 소음, 매연. 멍하니 생각을 비우며 걷다가 발 밟기 딱 좋게 늘 길을 가로막고 엎드려 있는 소들, 코끼리가 지나가고 원숭이가 빨래를 걷어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는 곳이 인도.


  태초에 혼란이 있었다면 인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늘 걸어다녔다. 자전거 릭샤 값 220원을 아끼기 위해서도 그랬지만 걷는 만큼 더 보이는 것이 인도였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여백이 없는 풍경이 신선했다.


  우다이뿌르 골목길을 걷던 어느 날이었다. 무엇이든 가득 차 더 들어찰 것도 없을 것 같은 풍경의 과밀하고 진하고 혼돈의 중심 같은 길에서 이미 정신줄을 놓고 있는데 저 멀리서 어떤 존재가 나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이 느껴졌다. 

  수많은 인파와 짜이를 파는 수레와 색색의 펀자비 드레스 사이를 뚫고,

  오로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있었다.


  개였다.


  버짐이 화석처럼 들러붙어 볼품없이 생긴 개.

  갈비뼈가 도드라지게 낡고 늙고 야윈 개.


  그 개는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하고 미친듯이 뛰어 왔다. 침이 뚝뚝 떨어지는 혀를 내어물고 단번에 나를 향해. 그러고는 나에게 풀쩍 뛰어올라 나를 툭툭 쳤다. 참 오랜만이야, 하는 몸짓이었다. 왜 이제 왔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 반가워하는 얼굴.

  도대체 저 확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나는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치다가 급한 대로 은세공점 가게에 몸을 숨겼다. 은반지와 팔찌와 발찌들이 반득반득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막 기도를 끝냈는지 향을 사른 냄새가 남아있는 가게의 유리문에 몸을 붙이고, 나가지도 물건을 사는 척도 돈이 있는 척도 할 수 없었던 가난한 나는 그대로 몸이 굳어 유리문 밖의 개를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 개는 주변의 그 모든 혼란을 뚫고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유리문 너머에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1루피를 아꼈던 당시의 내가 떠돌이개를 살뜰하게 챙겨 준 기억도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 우다이뿌르에 온 지도 며칠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자신을 못 알아보자 그 암담해하고 억울해하는 표정이라니.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깊어서 울컥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지? 왜 나를 안다는 것 같지? 나가서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물리면 낯선 땅에서 광견병으로 죽을까봐 그러지도 못했다. 마음이 복잡해지는 중에 주변의 인도인들이 위협적인 포즈로 개를 쫓아내주었다.


  그 찰나에 나는 문을 열고 오로지 앞만 보고 숨이 차오를 때까지 마구 달렸다.

  달리는 동안 갑자기, 번개에 맞은 듯 번쩍 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버지였나 보다. 우리 아버지인 거 같다.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폐를 못 쓰게 되어 돌아가셨다. 병원에 오래 입원해있다가 마지막으로 우리를 보고 싶다고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숨을 거뒀다. 아버지가 아픈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죽음 같은 건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때였다. 

  내가 아주 어리고 시골집에 살 때 할머니는 마당에 늘 개를 기르셨다. 그 개들은 때가 되면 목줄을 스스로 끊고 멀리 달아나곤 했는데, 등이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는 그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개를 잡아오곤 하셨다. 그리고 그 개는 늘 아버지의 개소주가 되었다.

  아직도 할머니의 부엌에서 사내 몇이 개를 잡던 소리가 기억난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의 불알부터 잘라내야 한다는 사내들의 소리도 기억난다.

  그 개들은 모두, 아버지의 폐포 깊이 박혀있는 먼지들을 털어내고 짧은 생을 하루하루 더 이어갈 수 있게 하는 보약이 되어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를 더 뜯어먹고 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자라면서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너무 많은 개를 드셨다는.


  인도에서 돌연 나를 향해 달려온 그 개가 아버지라는 생각이 든 건 무의식 속에 개들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인도에서 개로 환생한 것이라는 확신이, 그 순간에 번쩍 들어 내 몸에 달라붙었지만 다시 개를 찾아다니기엔 늦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업을 그렇게 치르고 있는 것일까. 구원받을 수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낯선 삶이 되어.

  그리고 그 눈빛. 나를 안다는 듯이, 너는 왜 나를 모르니, 정말 나를 모르니, 하던 그 몸짓. 그 낡고 비루하고 비쩍 마른 아버지같이 생긴 개의 슬픈 얼굴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달아나는 내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을 아버지. 그 찰나의 인연을 놓치고 이번에도 내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해가 지는 길을 홀로 걷고 있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또다서 홀로 걸어갔을 저승길을 생각하면,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보고 싶어진다.






#지금은, 개를 먹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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