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라지고, 개가 있는 풍경에 대하여
지인의 부친상 장례식에 다녀왔다. 누군가의 죽음에 이름이 불려갈 때마다, 집에 두고 온 강아지를 생각한다. 소중한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밤늦게 곡소리 한 가락 없는 고요한 빈소, 그의 아버지는 장기기증을 택했기 때문에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시신이 운구될 모양이다.
그래서 첫 조문객이 되었다.
국화 향기가 씁쓸했다.
함께 조문 가는 지인의 차를 타고 오면서, 제 나이에는 이제 얻을 것은 없고 잃어갈 것들 투성이네요, 했다.
대답이 없었다. 내내 눈만 내렸다.
어쨌든 이제는, 상실할 것들만 남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전에 아버지를 보내는 날, 3일 내내 나는 울지 않았다.
인생이 무상한 거로구나, 열일곱에 그 생각이 들었다. 애써가며 살 까닭이 없구나, 하고 그때 참 많은 것을 놓았다.
상실에 대한 체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정든 것들이 떠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올해는 천국이 질이 좋을 거예요, 예술가들이 많이 죽어서. 어설프게 위로를 하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조문을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아무리 겪어도 죽음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거라는 거다.
존재의 크고 작음은,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편의 위로가 닿지 않음을 알면서도 형식의 틀과 사고의 틀을 빌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천국에 가셨다거나,하는 좋은 말 뒤에 숨어서.
삶은 어차피 이렇게 끝나는 거라고, 죽고 썩어서 자연의 일부로 순환될 거라고,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영생이고 환생이며 천국이라고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리얼한 위로는 할 수 없다.
땀구멍 하나만큼의 슬픔도 메워주지 못하므로.
어쩌면 사람들은 위로를 가장하여 살아있음을 자축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타인의 죽음을 겪고 나면, 살아있는 모든 것이 낯설고 고맙게 느껴진다. 살아있다는 게 당연하다고 믿은 것들이 사실은 애써 불행들을 피해 다니는 고단한 삶의 끝에서 얻은,
우연의 축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는 시간.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 아직 날 떠나지 않아서 고마워.
밤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와 강아지와 산책을 한다. 살아서 뛰어다니는 조그만 생이다. 볼 때마다 새록새록 그립고 볼 때마다 새록새록 애틋한.
구름아, 하고 가만히 이름을 부르니 눈을 반짝이며 곁에 온다. 복슬한 머리털 위에 소복하게 내려앉는 눈을 털어주며 눈이 오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상실의 일상이 고요히 흘러가는 밤이다.
뒤늦게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