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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Aug 09. 2022

의식의 흐름대로, 군산

군산 여행



군산이 서해에 있는 줄도 몰랐다.


관심이 없는 도시였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대하소설을 읽을 때만 본,

그런 도시가 있구나 하는 정도의 막연한 장소였다.


별다른 계기 없이,

내게는 너무나 추상적인 곳이라 가보기로 했다.


숙소만 잡고

무념무상으로 있다가 출발했다.


가는 데 4시간 넘게 걸렸다.


1.수영하려고 선유도부터 갔는데, 바람 불고 뻘이 길어서 바닷물까지 가는 게 수고로워 보였다. 그래서 바다멍만 때리다가 왔다.

강원도는 앉았다 하면 돈인데, 여긴 파라솔도 무료에 샤워장도 무료 개방인 넉넉한 인심이 멋졌다.


2. 숙소는 화담여관으로, 2박 55000원에 도미토리를 예약했다. 매우 깨끗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곳이지만, 호스트가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쓰였다. 낯을 가리시는 것 같기도 하고...

통영 슬로비의 붙임성 좋은 쥔장님이 보고 싶어졌다. 옛날 정선애인의 부부 쥔장님도 참 좋았는데.


게스트하우스만 백 곳은 넘게 다닌 거 같은데,

이토록 쓸쓸한 표정의 호스트는 손에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돈을 모아 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었달까. 


그렇긴 한데, 불편함 없이 잘 머물다 왔다.



3. 선유도 외에는 일정이 없어서, 그렇다면 누구나 간다는 이성당에 나도 가볼까 하고 갔는데 휴무였다. 네이버에는 운영 중이라고 나왔는데 아니었다. 믿을 만한 빵덕후인 지인의 말에 따르면 그냥 동네 빵집 맛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파빠가 아닌 동네 빵집이 더 귀한 거 아닌가 싶다.


4. 이성당이 문 닫은 걸 보고 그럼 그냥 걸어야겠다,하고 걷다가 보니 멋진 카페가 있어 들어갔는데 신민회,라는 곳이었다. 검색도 안 해보고 그냥 간 곳인데 나만 모르고 모두 아는 그런 인싸 카페인 것 같았다. 카페의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만 원 넘게 주고 먹은 팥빙수는 그냥 비비빅 녹인 맛이었다. 냉동 과일의 이상한 단맛과 거친 얼음의 맛.


5. 찬 걸 먹으니 따뜻한 게 먹고 싶어...하며 그냥 걷다가 근처에 텐동집인지 우동집인지 일본스러운 가게가 보여서 들어갔다. 이름은 아직도 못 외웠고 아무튼 정체모를 우동과 생맥주를 시켰다. 면발도 국물도 튀김도 괜찮아서 담날 다시 가서 뭔가 가득 든 덮밥과 생맥주를 먹었다. 다찌가 있어 혼밥 하기 좋은 곳이었다.


6. 걷고 들어와서 오후 8시부터 담날 10시까지 잤다. 중간에 눈을 뜨고 심심해져서 탑건1을 봤는데, 젊은 날의 톰크루즈를 보니 마음 한켠이 쓸쓸해졌다. 청춘이 다 지나가버린 기분이랄까.


7. 이튿날. 역시 아무 계획이 없어서 지인이 추천한 은파호수공원이나 갈까 하고 지도 찍고 한창 걷다가 버스정류장의 노선도를 보니 거기 가는 버스도 있기에 기다렸다가 탔다. 타고 좀 가다보니 창밖에 CGV 영화관이 보여서,

그럼 영화나 볼까?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헤어질 결심,이 보고 싶었는데 없었다. 영화관 안 가본 지가 5년이 넘었으니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고...영화표가 13000원이나 하는 줄도 몰랐다.

어쨌든 아무것도 알아보지 않고 한 시간 반쯤 뒤의 비상사태인지 비상상황인지 비상탈출인지 비상 뭐라 하는 영화를 고른 뒤 시간을 때울 겸 나와서 또 걸었다.


8. 걷다 우연히 들어간 노란 색의 카페. 이름이 mem. 멤...?

빵도 팔기에 여쭤보니 10분 기다리면 크라상이 나온댔다. 그래서 아아랑 크라상을 먹었는데, 이  둘을 합쳐도 5500원밖에 안 하는데 극강의 가성비를 보여줬다. 크라상이 바삭하고 따뜻해 맛있었고 아아도 가격 대비 무척 훌륭했다. 고소한 풍미가 스벅보다 나았다.

그래서 30분 기다리면 나온다는 치아바타까지 주문하고 라테도 추가해서 먹었다. 갓 나온 치아바타도 맛있고 커피도 진하고 탄맛없이 깔끔했다. 사장님도 친절하셨다.

군산 다시 오면 여긴 꼭 다시 가봐야지. 


9. 영화를 보는데, 이건 시나리오를 발로 썼다는 확신이 왔다. 아무 검색도 없이 그냥 봤는데 보고나서 물어보니 지인들은 다, 그 영화 평점 안 좋던데?그걸 왜 봤어?하며 물었다. 나만 빼고 모두 알고 있었구나.ㅋㅋ 근데 다들 보지도 않을 영화 평점은 왜 알고 있는 거야. 보기 전에 다들 검색을 하고 남들 의견을 듣는 건가.

워크인으로 숙소 잡듯이 그렇게 그냥 한번쯤 홧김에 영화봐도 재밌지 않나. 아무 정보도 없이.


응. 재밌지 않다.

남들 의견도 중요하다.


송강호 믿고 봤는데 임시완에 반했고 전도연에 당황할 즈음 여자 사무장이 멋있어 보였다.

이병헌 나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터라 이런 초호화 캐스팅이라니 하며 보는데, 한창 영화 속 비상상황이 고조될 무렵 갑자기 상영관 내 비상등이 모두 켜지면서 사이렌이 울리고 대피방송이 반복되었다. 화재가 났으니 대피하라는 거였다. 마침 그때 영화 속 장면이 스펙타클해서 영화 내용인 줄 알다가 방송이 계속 반복되기에 영화가 아닌 걸 알았다. 커플들이 후닥닥 나가고 몇 안 되는 관객들이 동요하며 나가서 나도 상황 파악하고 따라나갔는데 오작동이라며 직원이 사과했다. 그후로도 대피방송이 반복되다가 그쳤는데 나는 원래의 좌석 말고 비상구 가까운 곳에 앉아서 영화를 봤다. 심장이 쫄깃했다.

그게 진짜 화재였으면 살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런 헤프닝을 겪었더니 그 상황이 영화보다 더 스릴있었던 터라, 극단적으로 착해지는 영화의 전개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임시완을 끝까지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10. 아무튼 영화가 끝나고 은파호수공원을 찾아 30분 걸었다. 그건 그냥 호수였다. 그랬지만 가는 길에 바람이 서늘해지는 순간이 좋았다.


11. 버스를 타고 돌아오다가 내릴 곳을 놓치고 엄한 데 내려서 20분 헤매다가 어제의 텐동 가게를 찾아갔다. 텐동과 생맥주를 먹고 베스킨 신메뉴를 먹으며 천천히 걸어 숙소로 왔다.


군산은 평화롭고 고요한 느낌의 도시다.

차가 있지만 선유도 갈 때 말고는 차를 세워두고 걷거나 버스를 타고 다소 정처없이 흘러다녔는데

오래되면서도 낡지 않은, 다정하게 쓸쓸한 도시 같다.

일본 소도시를 여행할 때가 떠오르는 소소한 골목들도 아름답고, 가까운 곳에 해지는 바다가 있다는 것도 좋다.

가게와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과한 데가 없었다.


군산,

홀로 걷기 좋은 도시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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