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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Oct 27. 2021

가르치는 기술, 5

멀어지는 일에 대하여



수업을 시작한 지 10분이 지났다.

쿵 하고 강의실 문을 발로 차며 중학생이 들어온다. 왜 늦었냐고 물어보니, 다 이유가 있다고요! 하고 짜증부터 낸다.


수업 중에 요란하게 그 아이의 벨이 울린다. ‘분명 무음모드를 해놨는데 울리는 거’라고 도리어 인상을 쓴다. 우격다짐이다.

미리 폰을 확인해두라고 하면 왜 자신을 믿지 않느냐고 토라진다.

가르치는 일을 십수년째 하다 보면 별별 일을 다 겪는다.


변기에 핫소스 뿌리는 아이, 담배 좀 사다 달라는 아이, 치아 보철물에 낀 음식 찌꺼기를 천장에 튕기는 아이에, 자기 비듬을 먹는 아이 등 가지각색이다.


말 똑같이 따라 하기, 무작정 싫다고 하기, 배운 적 없다고 잡아떼기, 연락 없이 지각에 결석까지, 매일 매일이 ‘청소년’이라는 외계 종족을 연구하는 일로 채워진다.

오랫동안 아이들을 이런 방식으로 겪어내다 보면, 이게 정말 큰 사회 문제처럼 보일 때가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죄다 불량하고 문제 있고 버릇없는 것들로 묶여 버린다.


민낯 그대로가 자연스럽고 예쁜 줄을 왜 모를까 싶고, 생기만으로 빛난다는 걸 알았으면 싶다. 폰은 그만 보고 대신 고전을 읽어 교양을 쌓고 왕따 시키지 말고 욕설 쓰지 말고 가르치면 한 번에 좀 알아듣고 잘못을 했으면 변명하지 말고 인정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면 모든 대상이 나보다 낮아진다.


그러다보니 내가 성장할 높이를 잃어버린다.


마치, 나는 완성형 인격체이고, 청소년들은 미성숙한 문제투성이처럼 치부된다.

나는 너희보다 더 살아봤기 때문에 더 멀리 볼 줄 아는 높이 나는 새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배려나 양보가 없는 아이들의 행동이 옳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럴 수 있음을,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왜 요즘 아이들은 이 모양일까 하고 비판하는 마음부터 든다.

내가 한창 청소년기를 지날 때 어른들에게 가졌던 감정과 의문들, 사회에 가진 불만들에서 내 스스로가 너무 멀어진 탓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종종 지각했고 선생님들에게 말대꾸했다. 선생님들은 화장하고 펌을 하고 사복 입고 출근하면서 우리는 왜 안 되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때는 선생님들이 감정적으로 나와도 대드는 애들이 적었다. 그들은 공격적 권위가 있었고 생사여탈권을 쥔 존재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어른들은 가식적이며 바깥은 모두 불의이므로 내가 옳다고 믿었다. 고등학교 교문 앞에서 자주 울었고 내가 어른이 되면 다 두고 보자고 으르렁거렸다.


그랬는데, 내가 실수를 덜 하고 예의를 차리는 어른이 되었다고 믿는 순간 까맣게 그때를 잊어버렸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문제이다.


나도 오랫동안 불완전한 가치관을 지닌 존재로서 부단히 부딪히며 살아왔다는 것, 어른이 싫고 세상이 밉지만 그럼에도 못난이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기다려왔다는 것.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가르친다면 답답하고 어이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막막함과 불안을 기억하는 일, 그때로부터 너무 멀어지지 않는 용기.


그게 청소년 교육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를 돌아보니

나는 너무 멀리 왔다.




가르치는 기술5,

어린 나와 멀어지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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