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악당 스라소니
38화 악당 스라소니
준이는 애니메이션을 볼 때도 진지하다.
웃긴 장면에서는 웃기도 하지만 굉장히 몰입하는 편이다.
그날도 그랬다.
영화 <주토피아2>를 보고 난 뒤 준이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엄마, 스라소니는 나쁜 애야.”
뜬금없는 판결이었다.
나는 ‘아 또 동물 한 마리가 억울하게 악당이 되었구나’ 싶어 웃으며 물었다.
“왜 나쁘다고 생각했어?”
“무섭게 생겼잖아 그리고 친구를 괴롭혀.”
준이의 세계에서는 외모와 행동이 꽤 중요한 판단 기준이다.
그 판단은 얼마 뒤 더 단단해졌다.
크리스마스 날 가족이 함께 본 <크리스마스 연대기 2>에서 또 다시 스라소니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 스라소니는 순록을 물었다.
그 순간 준이의 얼굴이 굳었다.
“엄마 봐 또 스라소니야.”
“그러네?”
“역시 스라소니는 악당이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얘가 스라소니랑 무슨 악연이라도 있나…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 다음에 시작됐다.
준이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결심한듯 말했다.
“그래도… 스라소니를 길들여야겠어.”
“응?”
“악당이면 더 길들여야지.”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이 아이는 ‘나쁜 존재를 없애자’가 아니라 ‘길들이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을 뒤적이더니 얇지만 묵직한 책 한 권을 꺼냈다.
〈어린 왕자〉였다.
“여기 있잖아 길들이는 법.”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준이는 지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책을 펼친 준이는 여우 이야기를 찾았다.
여우는 말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거야.’
준이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엄마 그러면 스라소니도 친구가 없어서 나쁜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
“혼자 있으면 무서워지잖아.”
나는 그 말에 가슴이 조금 찡해졌다.
세상을 아직 단순하게 보아도 될 나이에 이 아이는 이미 ‘외로움’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준이는 계속 읽었다.
‘서로에게 특별해지는 것.’
‘시간을 들이는 것.’
그러더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면 스라소니도 시간만 있으면 착해질 수 있겠다.”
“어떻게?”
“매일 조금씩 만나면.”
그날 이후로 준이의 상상 속에서 스라소니는 더 이상 악당이 아니었다.
길들여야 할 존재 이해해야 할 존재가 되었다.
어른들은 너무 쉽게 누군가를 악당으로 만든다.
말이 거칠면 나쁜 사람.... 행동이 다르면 문제 있는 사람.....
우리는 길들이기 전에 판단부터 한다.
하지만 준이는 달랐다.
나쁘다고 생각했던 존재를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야 할 존재로 다시 정의했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길들이는 데는 시간이 들고 기다림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마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주 포기한다.
하지만 준이는 아직 포기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더 단단하다.
나는 그날 크리스마스 트리보다 반짝이는 장면을 본 것 같다
한 아이가 악당을 책 한 권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순간을 말이다
아마 준이는 커서 스라소니를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악당을 보고 길들이자고 말하던 어린 왕자를 펼치던 그 작은 손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이 아이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것만으로도 이 크리스마스는 충분히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