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 “유럽 애들은 좋아하는 것만 배운다면서요?”
“유럽 애들은 좋아하는 것만 배운다면서요?”
예전에 유학 시절, 캐나다에서 온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색한 영어에 땀을 뻘뻘 흘리며 “유어 네임 이즈…?”라고 묻던 그 시절, 그 친구가 말했다.
“너는 수학천재니? 한국인은 다 수학 천재 같아?
“???”
그는 내 구구단 실력에 놀라워했다.
그 친구는 구구단을 중학교 때 배웠다고 했다.
“WHAT?!?”
나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2단부터 7단까지 외우고 있었다.
엄마가 문 뒤에 붙여둔 구구단표를 매일 외우고 테스트를 받았다.
특히 7단. 그건 마의 7단이었다.
그 7단은 왜 이리 안 외워지던지
“칠 삼이 이십일”을 단 0.3초 늦게 말하면 곧장 눈물이 이슬처럼 맺히던 그런 시절을 격었다.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이야기였다.
구구단을 중학교 때 배운다고?
그럼 덧셈 뺄셈하다가 13살쯤 “오, 이제 곱셈도 해볼까?”라고 하는 건가?
그 사이 우리는 방정식의 숲을 헤매다 쓰러질 판인데.
그건 아니다.
구구단을 외우지 않을 뿐 곱셈은 한다.
하지만 구구단을 외우지 않아서 빠르고 정확한 답이 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캐나다 애들은 창의적이고, 우리는 문제만 잘 풀지 않냐고!”
“우리는 시험용 뇌, 걔넨 삶용 뇌를 키우는 것 같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엔 항상 ‘반전’이 있다.
그 친구는 결국 고등수학 시간에 한계를 느꼈다고 했다.
나에게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 것도… 좀 좋은 것 같아.”라고 말했다.
오?
잠깐만요?
그럼 다시 주입식 하나요?
결국 문제는 ‘무엇을 먼저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우느냐’, 그리고 ‘왜 배우느냐’다.
우리는 그동안 ‘빨리 배우는 것’에 꽤 집착해 왔다.
한글은 만 4세에 떼고, 구구단은 초1에 다 외우고, 알파벳은 아기 때부터 본다.
‘얼른, 빨리, 더 빨리.’
교육이 마치 속도게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북미나 유럽 교육은 ‘아이의 즐거움’이나 ‘내적 동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가르침이 아니라, 깨달음을 중심에 둔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이 두 문화는 서로를 보고 부러워한다.
우리는 “쟤넨 자유롭고 창의적이야”라고 말하고,
그들은 “아시안은 수학천재”라고 한다.
결국 중요한 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교육 철학이다.
‘좋아하는 것만 배워도 괜찮은가?’
때로는 ‘싫어도 배워야 할 것’이 있는 게 인생이 아닌가?
아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칠팔오십육을 외우며 머리를 싸매는 날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답은 어느 한쪽에 있지 않다.
우리 아이에게 필요한 건 ‘유럽의 여유’와 ‘한국의 근성’이 동시에 담긴 제3의 교육 방식일지도 모른다.
나가서 뛰어놀 수도 있고,
돌아와선 차분히 구구단도 외울 수 있는.
즐거움을 배우고,
기초도 챙기는.
삶과 학습이 적당히 섞인 균형 있는 배움 말이다.
아이들은 그 둘 사이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색깔로 성장할 것이다.
조금 늦게 구구단을 외워도,
아이는 결국 ‘자기만의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