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3) 한국은 ‘기본’이라는 이름의 백과사전을 심는다
한국은 ‘기본’이라는 이름의 백과사전을 심는다
한국 교육은 말하자면 이렇다.
"자, 이 아이에게 ‘기본’이라는 이름의 백과사전을 통째로 심어봅시다."
그럼 선생님들과 부모님, 교과서 편찬 위원회, 심지어 옆집 아줌마까지 줄줄이 나서서
“이건 기본이지. 이건 다 알아야지.”
“그걸 모르면 어디 가서 무시당해.”
“이건 교양이야. 교양!”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결국 아이들은 하루 종일 교과서 속 세상을 산다.
국어: 글도 잘 읽고, 글도 잘 써야 한다. 문학이든 설명문이든 예외는 없다. 어휘력이 안 되면 다 안 된다고 한다.
수학: 덧셈 뺄셈만 할 줄 알면 되는 게 아니다. 분수, 소수, 각도, 비례, 확률, 함수… 안 나오면 섭섭하다.
과학: 지구는 자전하고 공전하고 끓고 식고 폭발하고 중력에 끌린다. 살아 있는 건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는 핵과 세포막과 미토콘드리아로 되어 있다.
사회: 지도는 반드시 봐야 하고, 위도 경도도 알아야 하며, 삼국시대와 근현대사도 동시에 외워야 한다.
음악: 악보도 읽어야 하고 리코더도 불어야 하고 박자도 맞춰야 한다. 고전 음악가 이름 정도는 입에서 줄줄 나와야 한다.
미술: 색상환은 기본. 점선면에 구도, 명암, 채도까지. 창의력은 감점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
체육: 줄넘기는 줄이 아니라 명예를 넘는 것이다. 달리기는 체력 테스트가 아니라 인생 예고편이다.
도덕: “너라면 어떻게 했겠니?”라는 질문에 정답을 대답할 준비를 해야 한다.
실과: 다림질, 요리, 바느질, 전기 회로… 인생에 필요한 건 다 이 한 과목에 몰아넣었다.
영어: Hello부터 시작해서 결국 “To be or not to be”까지 가야 비로소 영어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하나 빠지면 “기초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국어 못하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수학 못하면 ‘머리가 안 돈다’
과학 못하면 ‘논리적 사고가 부족하다’
음악 못하면 ‘정서 교육이 안 됐다’
체육 못하면 ‘사회성이 떨어진다’
그야말로 “다 못하면 다 부족한 아이”가 되는 구조다.
어느 하나를 잘하는 건 “특기” 정도고, 하나라도 못하면 “기초부터 다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건 ‘다방면의 천재를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이 아이의 재능을 찾아보자’가 아니다.
이건 철저히 ‘모든 국민은 교양을 갖춰야 한다’는 기반 확보형 교육 철학이다.
이쯤 되면 나라 전체가 ‘국민 모두 교양인 만들기 프로젝트’를 운영 중인 셈이다.
물론, 이 프로젝트는 대단히 성공적이다.
한국은 어딜 가도 평균 이상의 지식인 비율이 엄청 높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한국인이라면
“이게 왜 문제냐면요,…” 하며 말문을 연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다.
모두가 교양인이어야 하니까 누군가 특출 나면 불편하다.
“쟤는 왜 그것만 잘해?”
“기본도 안 됐는데 저거부터 배우면 안 되지.”
결국 특기는 숨기고 기본만 붙들게 된다.
그리고 이건 아이들에게
“재밌는 건 나중에 하고, 싫은 거 먼저 끝내.”
“좋아하는 거? 그건 시간이 남을 때 해.”라고 강요처럼 들린다.
그러다 결국 시간은 끝나고, 좋아하는 건 못하게 된다.
물론 교육이 교양을 주는 건 좋다.
다양한 분야를 고루 아는 건 분명 이롭다.
하지만 문제는 ‘기본’이라는 말이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기본’은 그냥 출발점이 아니라,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가 심은 건 백과사전인데, 거기서 열매는 뭘까?”
아이들이 심심할 틈 없이 다 배우고 난 뒤, 과연 그 안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을 여유는 있었을까?
어쩌면 이제부터는 교육의 철학을 살짝 바꿔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기초는 넓게 그러나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도록.
국민 모두 교양인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국민 모두 ‘자기 다운 사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