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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scist Jun 20. 2024

'매판'의 인간학

최근 번역, 출판된 게리 거스틀의 <뉴딜과 신자유주의>라는 책은 신자유주의 질서의 굴기와 몰락을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 책에서 '매판의 인간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거스틀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3년, 부시 행정부는 미국인들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이른바 '그린 존(Green Zone)'이라는 것을 만들었고 이 공간에는 이라크 사회 개조를 담당하는 여러 전문가들이 파견되었다.


이들 전문가 중 뉴욕주 로체스터 출신의 젊은(당시 36세) 공작원 중의 한 명인 앤드루 어드먼(Andrew Erdman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드먼은 이라크의 고등교육 담당 장관으로 파견되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이 '전문가'로 파견된 사람이 이라크에 대해 아는 것이 저의 전무했다는 사실이다. 이라크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그저 자신의 경력에 보탬이 되기 위해 이라크를 찾은 '전문가' 어드먼은 무언이든 해야만 했고, 결국 그가 이라크를 알기 위해 참고한 서적은 '론리 플래닛 여행 지침서(Lonely Planet Guide Book)'였다.(게리 거스틀 지음, 홍기빈 옮김, <뉴딜과 신자유주의>, 368쪽)


인터넷을 통해 여행 정보를 수집하는 MZ 세대는 '론리 플래닛 여행 지침서'를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잘 알고 있는데, 배낭 여행이라는 말이 한창 유행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론리 플래닛 여행 지침서'는 여행 필수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해당 지역에 대한 정보(지리, 식당, 유명 관광지 등)을 담고 있었고,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지식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라크라는 한 국가를, 그것도 해당 국가의 '고등교육'을 책임지는 전문가가 '론리 플래닛 여행 지침서'를 참고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일이다. 생각해 보라. 한국의 고등교육 개혁을 담당해야 하는 '전문가'가 한국 여행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한국 고등교육 개혁에 착수하는 장면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결과는 뻔할 것이다. 사회를 재-생산하는 중심축으로서의 교육이 난장판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한 가지 장면 더. 역시 거스틀의 책에 언급된 것인데,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멕시코 이민자들이 미국을 망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멕시코가 그 나라의 가장 뛰어난 사람들을 미국으로 보낼 리는 만무하죠. 여러분 같은 뛰어난 이들을 다른 나라로 보낼 리가 있겠습니까. 멕시코에서 넘어오는 자들은 각종 문젯거리들이고, 이 자들이 넘어오면서 그 문제들도 고스란히 넘어오는 겁니다."(게리 거스틀, 같은 책, 447쪽)


'매판'이라는 단어를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사리(私利)를 위하여 외국 자본과 결탁하여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 매판의 의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외국 자본과 결탁하여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것인바, 우리는 이러한 정의를 앞서 소개한 두 가지의 사례와 연결시킴으로써 '매판의 인간학'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트럼프가 인종주의적 시각에서 위와 같은 말을 했다는 점에서 그의 연설은 매우 심각한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수한 인재가 굳이 본토를 떠나야 할까'라는 트럼프의 언급은 생각해 봄직하다. 자기 나라에 필요한 우수한 인재를 내쫓는 일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일단 상식적인 나라는 아니다. 두 번째, 어드먼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식민지에 잠시 '방문한' 본토의 전문가는 식민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커리어를 쌓기 위해 식민지에 잠시 머물 뿐 그곳 자체의 장기적인 발전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공식에서 바라보면, 조선을 식민화했던 일본인들의 수준과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일본에서 잘 나가는 인재가 식민지 조선에 와야 했을까?', '일본에서 파견된 관리가 조선의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했을까?' 트럼프의 언급과 어드먼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조선을 '방문'했던 일본 관료들의 수준과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일단 본토에서 꼭 필요한 A급 인재가 아니었을 것이고, 설사 A급 인재였다고 할지라도 식민지 조선의 근본적인 발전은 그들에게 절박한 관심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A급 인재도 아닌 그리고 식민지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만을 가졌던 일본인들과 협력했던 '매판 인사'들은 어땠을까? 내심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일본인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니, 다음과 같은 인간이 되어야 했을 것이다: 일단 A급 수준의 문화가 아닌 그 이하의 일본 문화와 습성을 습득했을 것이고, '여기' 즉 조선의 발전보다는 본토(일본)의 발전에 더욱 방점을 둔 시각에 맞추어야 했을 것이다.


문화는 한 번 정착하면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이상 잘 변하지 않는다. 식민지 시절 착근했던 '매판의 인간형' 역시 마찬가지다. 최근 종영한 <수사반장 1958>을 보면, 정치 깡패 이정재에 협력하는 경찰들이 나온다. '깡패와 붙어 먹는 경찰'이라는, 이 무도한 존재들의 뿌리는 무엇일까? 한국 경찰의 뿌리가 친일파 인사들로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법조계 인사들의 뿌리가 식민 그리고 매판에 닿아 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드라마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매판 인사들의 특징은 비단 그 '악날함'만이 아니다. 그들의 가장 뿌리 깊은 특징은 불성실함과 무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어드먼과 트럼프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천박한 수준과 불성실함이야말로 식민지에 파견된 인사들의 본질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판 인사들은 그러한 인간학적 양태들을 충실하게 학습한 자들일 수밖에 없다.


과연 오늘날 이러한 '매판의 인간학'은 사라졌을까? 얼마전 한 국책 연구 기관이 인구 감소에 대한 대책으로 '여학생을 1년 일찍 입학시키면 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과연 이러한 대책을 내놓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모든 사안을 차치하더라도,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것은 바로 국책 연구 기관과 그곳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 연구 기관과 그곳의 연구원들이 한국 인구 소멸의 대책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가 '여학생을 1년 일찍 입학시키는 것'이라면 그들은 저능아다. 어떻게 전시 상태인 국가보다 낮은 출산율을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사고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불성실함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익히 알려져 있듯 한국의 기득권층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지목함으로써 자신들의 무지와 불성실함을 감춰 왔다. 그리고 그러한 장난질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고, 그러한 장난질이 여전히 통하기에 오랜 시간 전승된 매판의 인간형, 즉 무지와 불성실함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형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인재를 가리는 기준을 '학벌, 이념'과 같은 껍데기 같은 것들에서 '진지함과 성실성'이라는 차원으로 바꿔야 한다. 매판의 인간학이 만들어 놓은 인간 유형을 깨부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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