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클로드 르포르는 신이 사라진 세계, 즉 세속적 세계의 탄생을 모든 유기적 관계의 해체라고 규정했다. 세속적인 근대 사회가 도래하기 이전 세상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것이 신이 됐든 왕이 됐든 세상에는 중심이 있었고 세계는 그 중심을 바탕으로 위계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신체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그러한 위계적/유기적 관계는 영원히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몇몇 사상가들은 프랑스 혁명이 열어 젖힌 중심 없는 세계가 가능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 위한 사상의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중심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사상의 여정을 시작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 중의 한 명이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 칸트 작업의 핵심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이성’이라는 자기 스스로의 힘을 바탕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칸트 사상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살피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며 그것은 필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는 칸트가 대학, 특히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대학의 기능을 어떻게 규정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구상했던 인문학의 근본적인 쓸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칸트는 1798년 『학부논쟁』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의 핵심은 당시 종교적인 역할(그리고 그러므로 지배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던 신학부 그리고 실용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법학부와 의학부에 대비하여 철학부의 의미와 역할을 밝히는 것이었다. (신학부를 제외하고는 법학부와 의학부를 대비의 상대로 꼽은 것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과도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상위학부’에 속하고, 철학부는 ‘하위학부’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정부 자체의 관심을 끄는 학부들만 상위학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는 자신이 민중에게 가장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에 가장 관심이 크다.” 그러한 이유로 정부는 민중의 신앙, 재산, 건강에 각기 영향을 줄 수 있는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중의 직접적인 관심사와 관련이 없는 철학부는 왜 필요한 것일까? 이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단언컨대 학자공동체를 위해 대학에는 학부의 교설과 관련해서 정부 명령에서 독립한 채 어떤 명령을 내리지는 않지만 모든 것을 판단할 자유를 지닌 학부가 하나 있어야 한다. 이성이 공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해야만 할 경우 학문적 관심을 다룰 학부, 즉 진리를 다룰 학부가 하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학부가 없다면 (정부 자체에 해를 줄) 진리는 백일하에 드러나지 않겠지만, 이성은 본성상 자유로운 것이라서 (믿어라가 아니라 단지 하나의 자유로운 믿음뿐이라서) 뭔가를 참인 것으로 여기라는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칸트는 하위학부, 즉 철학부 존재의 이유가 본성상 자유로운 이성을 통한 진리 탐구에 있다고 본 것이다.
『학부논쟁』에서 칸트가 밝히고 있는 철학부, 즉 오늘날의 인문학의 역할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검증이었다. 칸트는 무조건적인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본성상 자유로운’ 이성을 사용해 정부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철학부의 역할이라고 본 것이다. 한데 칸트가 밝힌 인문학의 역할은 여전히 엘리트 중심적이다. 칸트가 구상한 인문학의 장소는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된 공간인 ‘대학’에 위치해 있으며, 인문학이 대학이라는 공간을 넘어서 어떠한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고 있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칸트에 비해 좀 더 넓은 시야, 즉 시민사회와 국가라는 차원에서 교육의 문제를 논한다. 훔볼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 사회에 개입하는 것은 사회의 활력을 감소시키고 다양성을 해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다양한 것들의 통합을 통해서 발생하는 다양성이야말로 사회가 줄 수 있는 최고선이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거의 항상 국가가 개입하는 정도만큼 상실된다. … 국가가 더 많이 참여할수록 단지 활동하는 자뿐만 아니라 활동의 영향을 받은 자 역시 더 비슷해진다.” 하기에 국가가 시민사회에 간섭할 수 있는 정도와 범위는 엄격하게 규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국가가 시민사회에 더 많이 더 깊이 관여할수록 다양성과 사회적 활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전제 하에서 훔볼트는 인간 교육의 역할이 시민의 자발성을 기르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최선의 길은 문제의 가능한 모든 해법을 다 제시하고 국민이 그 중에서 가장 적당한 것을 고를 수 있도록, 더 좋게는 모든 장애물을 적절히 묘사함으로써 국민이 스스로 해결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 국가의 역할이 지나치게 많이 확장되는 것은 행위의 에너지 전반과 도덕적인 성격을 더 많이 해친다. … 지나치게 많은 지도를 받는 사람은 자발성을 쉽게 잃을 수 있다.”
칸트 그리고 훔볼트의 견해의 밑바탕에는 이성적 주체의 육성이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다. 칸트는 본성상 자유로운 이성을 통해 진리를 검증하고 정부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철학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훔볼트 역시 국가가 관여할 수 있는 범위를 적절하게 조절·통제하기 위한 자발성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칸트와 훔볼트의 견해를 종합하면, 결국 인문 교육의 필요성은 국가 혹은 독재자의 권력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이성적 주체의 육성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훔볼트로부터 국가 권력에 대한 적절한 견제를 위해서는 자발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이 시민사회 전체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트와 훔볼트가 언급하고 있는 인문학 또는 인간 교육의 의미와 역할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국가의 최고 권력인 ‘주권’이 국민/인민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핵심 전제는 한국에서 가장 전면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실행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곧 ‘선거’인바('선거' 이외의 요소가 민주주의와 연관되어 언급되지 않는 것도 한국적 민주주의의 좋지 않은 특성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비롯한 중요한 대표자의 선출에 있어 한국은 무조건적인 ‘1인 1표’를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각 나라마다 상이한 민주주의 체제의 특징을 비교할 여유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미국은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진 ‘양원제’를 택하고 있다(사실 한국인 중에 미국이 양원제를 택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사실에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양원제는 엘리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상원과 일반 대중을 대표하는 하원으로 구성된 의회제 형태로서, 이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는 민중의 의사와 수준이 그대로 국회에 투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상원이 중우정치의 위험성을 방지하는 모종의 안전판이자 필터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1인 1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동시에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 정치 체제에서는 국민/인민의 의사와 수준이 국정 운영에 아무런 여과 과정 없이 직접적으로 투사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국가의 권력을 적절히 견제하고, 국가가 하달하는 명령을 이성적으로 검증하기 위해 더욱 수준 높고 광범위한 인문학 교육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국민/인민의 의사가 투표를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국정 운영에 반영되는 것이라면, ‘국민/인민의 수준=국가의 수준’이라는 공식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것은 곧 국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민/인민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문학 교육과 민주주의의 상관 관계는 거의 과학적 원리처럼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국민/인민의 직접적 참여’라는 등식에서 ‘국민/인민의 수준=국가의 수준’이라는 공식이 도출되는 것은 별다른 이론의 여지가 없는 너무도 당연하면서도 자명한 원리인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명한 원리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것일까? 만약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문학 교육 간의 관계가 건강하게 작동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면 누구도 쉽게 ‘그렇다’라는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과 인문학 교육은 사실상 고사 상태에 처한지 오래이고, 이제는 차라리 그러한 문제 의식 자체가 증발되어 버린 상황에 처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민주주의와 인문학/인문교육의 관계가 끊어져버린 결과를 우리는 지금 처절하게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의 병근이 깊고도 구조적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문학/인문교육의 불협화음은 꽤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언제부턴가 그러한 병근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살아오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러한 병근이 너무도 깊고 그것이 내뿜는 악취가 너무도 심해 고개를 돌려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악취를 견디고 곪아터진 상처를 직시할 때에야 비로소 치료의 가능성은 열리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