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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scist Sep 29. 2024

인문학이 버린 나라/인문학을 버린 나라 - 4편

한동안 인터넷 상에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라는 글이 돌아다닌 적이 있다. 이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본은 무너졌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조선인들이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여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를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보아라! 실로 옛 조선은 위대하고 찬란했으며 찬영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은 식민교육의 노예들의 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나무위키’에 따르면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 글은 오히려 한국 사람이 번역기를 돌려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혹자는 아베 노부유키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더욱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는 오히려 저러한 글을 ‘한국인’이 그것도 번역기까지 돌려가며 작성했다는 사실 자체다. 만약 저 글을 한국인이 작성한 것이라면, 왜 그러한 글을 썼던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글을 한국인이 작성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을 누가 작성한 것인지 추적하는 일은 사실 불가능하다. 또한 설사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쓴 사람을 찾아내 모종의 처벌을 가할 수 있는가의 차원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인’이 작성한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라는 글이 드러내고 있는 한국인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 그 자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논하려고 하는 한국 인문학의 위상은 그러한 무의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육 연구자인 마이클 세스(Michael J. Seth) 교수가 저술한 <한국 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 기관을 건설한 일본 점령자들에게 인문학 교육은 애초부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다. 조선에 설치된 “교육 과정은 일본 학교의 것과 같지 않았는데, 조선에는 인문 교과에 더 적은 시간이 배정되었다.”(50-51) 그 이유는 “‘불온사상’이 한국인들에게 주입되는 것의 위험성”이 교육 자체보다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었다.(59)


다시 말해 일본 총독부는 문학, 철학, 역사와 같은 인문 교육이 식민 현실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켜 조선인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저항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인문 교육의 실시를 최대한 축소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일제는 초등교육기관을 확대하고 있는 와중에도 고등교육 기관의 수를 더욱 제한했고, 교육과정을 뜯어고쳐 인문학 교육과 비중을 줄이고 저급한 기술교육과 직업훈련을 확대했다.”(58)


세스 교수가 밝혀낸 식민 교육의 요체는 결국 조선인으로 하여금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박탈하는 것이었다. 앞서 ‘인문학이 버린 나라/인문학을 버린 나라’ 3편에서 인용한 칸트가 언급했던 것처럼, 철학으로 대표되는 ‘하위학부’의 역할은 이성을 통해 정부의 권력을 검증하는 것이었다. 또한 당연하게도 이성의 활용이라는 ‘하위학부’의 역할이 비단 정부 권력의 비판과 검증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은 정부와 관련된 사안만이 아니라 개인 및 사회 전체와 관련된 거의 모든 문제에 관한 가치 판단과 연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문학 교육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모든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일제는 인문학 교육을 축소시킴으로써 조선인으로부터 바로 이러한 사유 역량 자체를 박탈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위상은 일제가 조선에 만들어 놓았던 당시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당연하게도 처참한 상황에 처한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위상을 일제 시대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일제가 패망한 지 한 세기가 다 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한국 인문학이 처한 상황을 모조리 일본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인문학의 교육을 축소했던 일제의 의도가 오늘날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떨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스 교수의 언급대로 일제는 자신들이 설계한 식민지 교육을 통해 ‘생각하지 않는 조선인’을 만들어내고자 했던바, 실상 오늘날의 상황은 일제가 바라던 그대로 ‘생각하지 않는 한국인’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육은 체계적으로 인문 교육을 축소하고 나아가 폐기시켜 가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나라의 앞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당장 오늘과 내일의 삶도 힘겨워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라는 글의 작성자는 한국인으로 추정된다. 혹시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그 글을 작성한 사람이 일본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나무위키’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저 글을 작성한 사람이 ‘한국인’이라면 그것은 서글프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일일 것이다. 그 글을 수고롭게도 ‘번역기’까지 돌려 작성한 한국인은 혹 식민지 조선의 교육에 관한 일제의 의도가 오늘날 한국에서 현실화하고 있음을 절감했던 선각자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라는 글은 마치 유언비어처럼 인터넷 공간을 떠돌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 글이 단순히 유언비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현실을 예언한 ‘성지글’이자 한국인의 무의식 -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식민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 을 짚어낸 모종의 징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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