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한 선배를 알고 지냈는데, 그 선배의 남편은 미국 국적자였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2000년대 초반쯤 나는 그 선배와 밥을 먹으면서 선배가 얼마 전 ‘소개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개장’. 일견 어느 곳에 자신을 소개해주는 문건으로 생각하지 쉽지만 그 선배가 이야기해준 ‘소개장’은 ‘疏開狀’이었다. ‘소개(疏開, evacuation)’의 사전적 의미는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함’이다. 그 선배가 받았던 ‘소개장’은 곧 북한의 공습에 대비해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 국적자들을 특정 장소로 소개(evacuate)시키는 내용의 편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소개장’에 적혀 있던 ‘소개 대상’은 미국 국적자인 그 선배의 남편과 딸 뿐이었다. 한국 국적자인 선배는 소개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휴전’과 ‘분단’이라는 상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국인 대다수는 ‘휴전’의 의미를 그다지 깊게 그리고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분단’이라는 상황 역시 그다지 깊게 고민하지 않는다. ‘휴전’과 ‘분단’은 일상이 되었으며 뉴스를 통해 가끔 전달되는 잠깐의 ‘소동’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그때 그 선배가 받았던 ‘소개장’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은 아무 이유도 모른 채 - 그 때 선배는 왜 자신의 집에 미국민을 대상으로 한 ‘소개장’이 배송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그렇다. 우리는 전쟁이 잠시 멈춘 ‘휴전 상태’ 속에 살고 있으며, ‘분단’은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확인시켜주는 무/의식적 구조였다.
한국 사람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그 선배에게 느닷없이 ‘소개장’이 배달되었던 것처럼 외부자의 시선에서 한국은 전쟁 직전에 놓여 있는 나라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언제라도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휴전 국가이자 분단 국가에 살고 있다는 ‘현실감’은 문득 문득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마치 ‘정신 차려… 내일이면 모든 게 날아갈지도 몰라…’라는 말을 속삭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스피노자는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했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숭고한 결심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내일 전쟁이 난다면… 사과 나무는 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방도를 구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최소한 나와 내 가족이 살아갈 방도를 구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은 어쩌면 한국인들의 뇌리 안에 박혀 있는 ‘무의식’일 수도 있다. 그리고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분단이라는 구조는 그러한 무의식을 재/생산해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북한의 위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년? 20년? 쉽게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결코 30년은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에서 풍선이 날아들고 있는 지금, 되돌아 보면 북괴가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이 땅에서 잠시 자취를 감춘 것은 기껏해야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쯤 될 것이다(물론 그때도 간간히 ‘북핵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북괴가 내려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문화적 무의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른 모든 학문 분야가 그러하겠지만 특히 인문학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인문학이 뿌리를 내리려면 ‘인간다움’을 사색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물론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전쟁의 와중에서도 위대한 철학은 탄생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인 것도 아닌 그렇다고 평화 상황인 것도 아닌 어정쩡한 휴전 상황은 만성적인, 하지만 불현듯 날카롭게 덮쳐오는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내일보다는 오늘, 저곳보다는 이곳에 시선을 머물게 한다. 한마디로 ‘분단’이라는 구조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분단’이 우리 사회를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소모적인 이념전쟁을 통해 확인된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건국일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거의 세계 유일의 국가다. 또한 좌파 경력 - 그것도 해방 이전의 - 을 빌미로 독립전쟁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의 서훈을 박탈해야 한다는 그야말로 반지성주의적인 주장이 아직도 횡행할 수 있는 나라다. 실상 ‘분단’이라는 구조는 간헐적인 불안과 ‘좌/우’라는 반지성주의적 이분법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는 구조적 원천인 것이다.
아무리 기술을 발달시켜도, 아무리 의사가 많아져도 ‘분단’이라는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인들이 기술과 의학에 집착하는 것은 ‘분단’이라는 구조에서 비롯된 ‘오늘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표현은 아닐까. ‘분단’을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통일이 됐든 영구분단이 됐든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힘은 인문사회과학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제 자신의 근원적 정신 구조를 사유할 수 있는 인적 자원마저 고갈시켜 버리고 있다.
‘분단’을 사유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도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인재가 고갈될 수록 한국 사회는 더욱 ‘불안’의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댈 것이다. 그리고 전쟁도 아닌 평화도 아닌, ‘휴전’이라는 어정쩡한 상태가 만들어내는 만성적인 불안은 결국 자신을 삼켜버릴 것이다. 홍범도 장군 흉상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분단’이 만들어내는 이 불안은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이성적인 대화를 집어 삼키고 있으며 ‘좌/우’라는 극단적이면서도 허구적인 패러다임 안에서 미친 듯이 널을 뛰는 ‘불안의 굿판’만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