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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scist Nov 28. 2024

박근혜와 윤석열은 무엇이 다를까?

마르크스는 역사가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 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를 받아들이기 가장 힘든 문화-정치적 조건을 갖춘 ‘분단국가’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의 말이 그대로 구현되고 있는 현실을 웃픈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반복되고 있는 이 역사가 희극인지 비극인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말할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현실 앞에서 희극과 비극을 따져 묻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전개 방식은 일단 비슷해 보였다. 보수 진영의 후보가 ‘간신히’ 집권을 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탄핵’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지지율이 폭락하고, 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하고, 시민들은 촛불을 들기 시작한다. 일견 비슷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반전이 일어났다. 박근혜의 지지율은 그대로 추락해 탄핵으로 이어졌지만, 윤석열의 지지율은 다시 반등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지율이라는 고약한 신기루보다 더욱 심각한 반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전만 못한 ‘촛불’의 열기다. 박근혜와 윤석열이라는, 얼핏 ‘역사의 반복’처럼 보였던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바로 ‘촛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온도차’다.


이 촛불의 ‘온도차’에 관해 <오마이뉴스>는 ‘'박근혜 탄핵' 외쳤던 시민들은 왜 주저할까’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토요일만 되면 광화문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권력에 맞서서 다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관련해서는 아직 말이 많습니다. 8년 전과 비교하면 생각보다 뜨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매일 언론에서 펑펑 터지는 특종을 보고 있노라면, 이쯤 되면 수많은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정권 퇴진을 외칠 만도 한데, 아직 광장의 촛불은 2% 아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8년 전 거리에서 풍찬노숙하며 박근혜 탄핵을 외쳤던 역전의 용사들은 왜 아직 관망 중일까요?


이어서 기사는 촛불 집회는 ‘시민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민주당 중심의 ‘정치색’을 지워야 비로소 촛불이 거국적인 움직임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당파성’을 고려한다면 <오마이뉴스>의 반응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언론 보도의 중립성 같은 시덥지 않은 이야기는 여기서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오마이뉴스>의 위와 같은 관점은 역사의 ‘반복인듯 반복 아닌 반복 같은’ 현상황의 핵심을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 그렇다면 윤석열은?


사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지만, ‘박정희 시대=독재의 시대’라는 공식은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인식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러한 등식 안에서 ‘박근혜=독재자의 딸’이라는 공식 역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 우선 맞다.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는 분명 ‘일반인’의 삶을 경험한 적이 없는 특권층, 나아가 ‘공주’였다. 하기에 박근혜를 탄핵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손쉬운 일이었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 대통령일지언정 온갖 특혜를 받으며 자란 저 ‘공주’가 ‘민주공화국’의 지도자라는 사실은 정말이지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윤석열은? 윤석열은 독재자의 아들인가? 아니다. 하기에 그는 왕자도 아니다. 그는 기껏해야 일개 교수의 아들일 뿐이다. 또한 윤석열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특혜를 누리면서 살아온 사람도 아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시험을 보고 ‘서울대’, 그것도 ‘법대’에 합격했고, 무려 ‘9수’ 끝에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혹자는 그가 ‘교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들먹이며 ‘특권층’ 운운할 수도 있을 테지만, 박근혜가 누린 것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그의 인생 역정 - ‘사시 9수’ - 자체는 그야말로 흔해 빠진, 그래서 아무런 특혜도 찾아볼 수 없는 가장 ‘대한민국적인’ 성공 스토리 아닌가(공정한 시험,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마침내 거머쥔 성공…).


결국 핵심은 윤석열은 대한민국의 사회 시스템,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교육 시스템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자의든 타의든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경쟁 시스템 속에 내던져진다. 더군다나 ‘서울대’에 ‘법대’를 더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아니 이제 ‘N수’ 시대가 된 마당에 몇 수를 해서라도 ‘서울대’에 가야하는 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윤석열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교육의 ‘총아’이자 ‘성공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와 윤석열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쉽게 말해 박근혜는 ‘우리’와는 다른 특권층 그 자체였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 속한 ‘일반 시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다르다. 그는 그다지 특권층도 아니며, 우리 사회 성공 스토리의 표본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까지의 삶이 대한민국의 주류적 욕망의 이상형(ideal type)임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아둔한 순수함 아니면 가식적인 위선이다. 하기에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인물-사건’은 윤석열이라는 개인의 차원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인물-사건’은 차라리 대한민국 사회의 산물이자,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의 산물이다.


우리는 ‘촛불’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촛불의 ‘온도’가 예전같지 못한 가장 즉자적인 이유가 ‘피로감’과 ‘허무함’일 수도 있다. 반복되는 탄핵이 ‘벌써’ 지겨워지고, ‘탄핵’을 해봤자 별 거 없다는 허무감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박근혜를 탄핵했을 때 ‘촛불 혁명’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됐다. 하지만 ‘혁명’이라는 단어는 이제 무색해졌다. 바뀐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왜 촛불 ‘혁명’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고 윤석열이라는, 한국 교육의 총아이면서도 무능력한 지도자를 그 자리에 앉혔는가?


어떤 이는 ‘갈등’ 자체가 민주주의의 특성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갈등’만’ 반복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더군다나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끊임없이 탄핵에 노출된다면 그 피해는 온전히 국민의 몫이다. 하기에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촛불과 그 온도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촛불을 다시 들지 않고도 좋은 정치를 만들 수 있는가다. 그리고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은 탈권력, 반권력만이 아니라 좋은 권력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앞서 나는 윤석열이라는 ‘인물-사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그리고 교육의 산물일 수 있음을 말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윤석열이라는 ‘인물-사건’은 최소한 그 ‘외양’에 있어서는 - 그리고 이 ‘외양’에 집착하는 것이 한국 교육의 특성이자 맹점이다 - 한국 교육 시스템의 ‘표준’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 사회가 길러낸 그 ‘표준’은 비겁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하다. 이는 바꿔 말해 우리 사회가 길러낸 ‘엘리트’가 비겁, 무능, 무책임이라는 성질을 갖도록 체계적으로 길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는 '촛불'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생각해야 한다.


‘좋은 정치’는 결코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나쁜 정치’가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난 악마 같은 인물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나쁜 정치’는 오히려 오랜 시간이 켜켜이 쌓여 도착한 그 사회의 ‘성적표’일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좋은 정치’는 오랜 시간 노력해 만들어내는 시민 사회의 성적표일 수도 있는 것이다.


‘탄핵’의 유령이 거리를 배회하는 지금, 또다시 모든 언론은 윤석열이라는 ‘개인’에게 집중해 모든 잘못을 그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윤석열이라는 인물은 결코 ‘외계인’이 아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교육을 받았고, 한국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아 왔다. 최소한 대통령이 되기 이전까지는. 하기에 나는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라는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 있게 ‘대통령 이전의 윤석열’의 삶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도 텔레비전에서는 의사와 검사가 권력을 휘두르는 ‘저 세상’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 사회의 ‘표준’인양 송출되고 있고 대한민국 국민은 그러한 드라마에 열광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문해 보아야 한다: 촛불이 예전같지 못한 이유는 혹 윤석열은 박근혜와 다르게 우리 사회가 길러낸 ‘표준’이라는 모종의 무의식(또는 심지어 죄의식)이 그 열기를 식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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