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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scist Mar 05. 2023

헬조선 설명서

우리는 왜 '헬조선'에 살게 됐을까

chapter 1. 교육이라는 지옥도의 기원


Part 1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그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건 ‘교육’ 문제다. ‘교육’이야말로 한국인들, 특히 젊은 세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이며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부모들까지  - 사실상 전국민을 - 고통에 몰아 넣는 핵심 요소라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실상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삶의 가능성을 길어내 주는 계기가 아니라, 인생에 등급을 부여하고 그 등급에 근거한 흡사 신분제에 가까운 분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면서 세속적 욕망의 분배 기제로 작동한 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한국의 교육이 신분제와 결합되어 세속적 욕망의 분배 체계로 작동한 것은 조선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구조 안에서 본격적으로 신분제에 가까운 분류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건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다. 한데 더욱 놀라운 건 ‘반일(反日)’을 일종의 ‘국시(國是)’로 삼아온 이 나라에서 일본이 구축해 놓은 교육 체계를 1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교육이 준(準, quasi)신분제적 욕망 배분의 메커니즘으로 고착된 것이 일제의 탓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 역시 그것에 기회주의적으로 타협했으며, 때로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옹호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를 ‘헬조선’으로 만든 핵심 기제인 ‘교육’의 문제 이면에는 식민적 욕망의 구축과 그것에 대한 한국 민족의 기회주의적 타협이 놓여 있었던 셈이다.


상부학부와 하부학부


  ‘헬조선’의 핵심 기제인 ‘교육’ 문제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우리는 잠시 개념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신분제와 같은 분류 메커니즘으로 작동한 것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물론 한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1960년대에서 1990년대 초중반까지, 교육은 그래도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장 공정한 그리고 최후의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실제로 ‘교육’에 세습적 성격이 투사되고, 이른바 ‘돈 되는 학문’만이 살아남게 되면서 한국 사회의 ‘교육’은 그야말로 ‘올바른 상식을 갖춘 시민의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 –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제대로 뿌리 내린 적이 없는 – 을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다.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 즉 ‘헬조선’의 ‘교육’이 이처럼 오직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탐색하기에 앞서 칸트의 이야기를 통해 문제의식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1798년 출판된 『학부들의 다툼』이라는 책자에서 칸트는 대학의 학문 체계를 크게 ‘상부학부’와 ‘하부학부’로 분류한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상부’와 ‘하부’라는 구분의 “관건은 학자층이 아니라 정부였다는 사실”(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73)이다. 다시 말해 ‘상부학부’와 ‘하부학부’라는 구분은 학문 혹은 그것을 수행하는 학자의 지위에 의한 구분이 아니라 정부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상부학부’는 “정부 자체의 관심을 끄는 학부들”(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73)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하부학부’는 “학문적 관심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학부”(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73)인바, 그것은 정부에 관할 하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민중 자체의 이성에” 맡겨진다.

  칸트는 정부의 필요에 의해 구성된 ‘상부학부’에 신학, 법학 그리고 의학을 포함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신학, 법학, 의학이 정부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부응하는 ‘상부학부’에 포함되는 이유에 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부가 이성에 따라 (민중에게 영향을 미칠) 정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동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 각자의 영원한 평안, 둘째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의 평안, 셋째는 신체의 평안(장수와 건강)이다. 정부는 첫째 것과 관련된 공적 교설로 신민의 내적인 생각과 가장 은밀한 규정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즉, 정부는 신민의 내적 생각을 발견하고 은밀한 의지규정을 조정하는 데까지 최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부는 둘째 것과 관련된 교설로 신민들의 대외적인 활동을 공법의 틀 안에 묶어둘 수 있다. 셋째 것을 가지고 정부는 의도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강인한 다수 민중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이성에 따라 통상적으로 채택된 그 서열은 분명히 상위학부들 중에서 매겨질 것이다. 즉 첫째로 신학부, 둘째로 법률가들의 학부, 셋째로 의학부라는 서열이 매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본능에 따르면 의사가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의사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자이기 때문이다.(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76)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정부의 필요에 의해 구축된 ‘상부학부’는 인간의 영혼, 재산 그리고 육체에 대한 학문이다. 신학부는 인간의 영혼을 관리하는 학부이고, 법학부는 시민의 재산과 법률적 재산의 보호에 관한 학문이며, 의학부는 인간의 육체와 그것의 건강에 관한 학문이다. 이상의 세 학부는 인간의 즉자적인 필요성, 즉 한 개인의 ‘안녕’ 혹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학문이다.

  이에 비해 ‘하부학부’의 역할은 인간의 즉자적인 필요성과는 별 관계가 없다. ‘하부학부’의 역할은 한마디로 말해 ‘이성의 활용’인바, 칸트에 따르면 이른바 ‘이성’이라는 것은 “자율에 따라, 다시 말해 자유롭게 판단하는 능력”(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84)이며 ‘하부학부’의 핵심적인 역할은 이성을 활용해 ‘상부학부’를 검사, 제어하는 것이다.     


  세 상부학부와 관련해서 (‘하부학부’인 – 인용자) 철학부는 이 세 상부학부를 제어하는 일에 종사하며, 이로써 상부학부에 유익한 존재가 된다. 모든 일에는 진리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상부학부들이 정부에 약속하는 유용성이란 단지 두 번째 순위를 차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철학부는 신학부의 시녀’라는 의기양양한 신학부의 주장을 경우에 따라서 인정할 수도 있다. (이때도 다음과 같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즉 철학부는 자신의 은혜로운 귀부인인 신학부 앞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뒤에서 치맛자락을 들고 있는가.) 만일 사람들이 오직 모든 학문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상부학부들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임마누엘 칸트, 한길사판, 284~285)     


  칸트가 명확하게 개념화하고 있듯 ‘상부학부’는 정부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것이며 그 역할은 영혼, 권리 및 재산 그리고 육체에 대한 직접적인 안녕을 공급,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부학부’의 역할은 그러한 직접적인 안녕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이성을 통한 ‘진리의 검증’ 자체가 ‘하부학부’의 핵심 역할이다.

  200여 년 전에 칸트가 작성한 글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헬조선’에서 ‘교육’, 좀 더 정확히 말해 ‘입시’가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그 누구도 오늘날 ‘헬조선’에서 ‘상부학부’가 ‘하부학부’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신학부’가 한국 사회에서 별다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 실상 이것도 매우 이상한 일이다. 신앙에 대한 열정이 그토록 강한 한국 사회에서 종교는 그저 사적인 영역일 뿐, 공적인 역할을 전혀 담당하지 못한다. - 은 차치하고서라도 ‘법학부’와 ‘의학부’가 압도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더욱 심화되어 오늘날 입시의 최종적인 목표는 ‘의학부’ 입학만으로 더욱 좁혀지고 있다(오늘날 입시의 목표는 ‘서울대 입학’ 도 아니고 ‘SKY 입학'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의대 입학’만이 입시의 최종적인 성공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누구도 한국 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오늘날 한국인 모두는 한국 교육의 방향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씁쓸해하고 또 전전긍긍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고 예리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앞서 살펴봤던 칸트의 분류 체계에 따르면 한국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은 명확하다. 오직 ‘상부학부’적 지식에만 몰두하면서 – 물론 여기서 ‘신학부’는 제외다. - ‘하부학부’의 역할을 냉소하는 것.

  이러한 경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문송/함’이라는 신조어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줄인 ‘문송/함’이라는 개념 안에는 ‘하부학부’에 대한 조롱과 냉소가 응축되어 있다. 이러한 조롱과 냉소를 칸트의 분류 체계 안에서 풀어보면, ‘문송/함’에 내재되어 있는 ‘헬조선’의 저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오직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상부학부’의 학문만 하라. ‘하부학부’는 필요 없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는 지식에 대한 ‘이성적 검증’이 상실된 세상에 살게 되었다.

  육체는 날로 건강해져 오래 살게 되었다. 최고 수준의 학생들이 모두 의학부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 사는 육체는 행복하지 못하다. 왜? ‘헬조선’에 살기 때문이다. ‘하부학부’가 천대받는 교육 구조(혹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모든 ‘인간적 가치’ - 오늘날 우리는 ‘헬조선’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적 가치인 연애, 결혼, 출산, 존중, 연민 등등등을 포함한 'N가지의 것'을 포기해야 한다. - 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더 나은 방향 –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더 나은 방향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천대받는다.  - 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왜? ‘하부학부’는 멸시당하고 천대받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헬조선’에 살게 되었다. ‘불행한 사회 속에 깃든 건강한 육체’. 참으로 역설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헬조선’의 본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성, 즉 ‘상부학부’가 ‘하부학부’를 압도하는 경향성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흔히 알고 있듯 ‘조선’은 지나칠 정도로 ‘문(文)’을 숭상하던 나라가 아니었던가? 그 기원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일제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헬조선’의 욕망 구조가 식민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그리고 한국인은 ‘반일’을 외치면서도 그러한 구조에 어떻게 타협해왔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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