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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민주주의의 ‘밑천’은 남아 있는 것일까?

by gramscist

한국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가장 고약한 고정 관념 중의 하나는 ‘경제 발전에 의한 민주화’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화가 이룩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 왔다.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이 머리 속에 장착되면서 한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자리 잡았다: 민주주의는 어차피 경제 발전에 의한 결과이니, 경제를 발전시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기에 경제 발전, 즉 물질적 성장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또한 민주주의는 물질적 발전의 결과물이기에, 물질적 발전의 결과물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곧 민주주의다.


그 근저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 최소한 1997년 IMF 사태 이후부터 약 30년 동안 - 한국 사회는 위와 같은 공식에 근거해 살아 왔다.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이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오늘날의 상황에 몰아 넣은 가장 근본적인 인식 구조다. 물론 이와 같은 인식이 뿌리 내린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터이다. 식민, 전쟁 등등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과정 속에서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은 한국인이 습득한 경험칙(經驗則)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경험칙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아주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다.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는 무너졌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는 그 생각 때문에 민주주의가 무너졌다.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우리는 우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다시 규정해 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그리고 왜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주의라는 공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합쳐진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아무런 위화감 없이 통용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려는 노력은 그야말로 일천하기 그지 없다. 한국인들은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자신의 정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뭉뚱그려 이해해 왔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리를 ‘자유주의+민주주의’로 구축해 두었음에도 공식적인 교육 과정 등을 통해서도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 방식 속에서도 해당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무심한 상태로 살아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민주주의는 위험한 정치 체제로 인식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이 민주주의를 위험한 정치 체제로 인식한 이유는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인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정치 사상가들은 무지한 인민에게 정치 체제에 관한 결정권이 별다른 제한 없이 주어질 경우 중우정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본산이라고 여겨지는 미국 - 물론 오늘날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 의 정치 체제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상원과 하원의 구분이 그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결코 ‘말 그대로’ 만인의 평등을 추구하지 않는다. 화려한 조명과 대중들의 환호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절대로 평등하지 않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상원을 통해 그리고 ‘딥 스테이트’라는 소수 엘리트들 사이의 협의를 통해 중우정치를 방지해 왔다. 요컨대 미국의 정치 체제 내부에는 민주주의의 중우정치로의 퇴락을 방지하기 위한 모종의 안전장치가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중우정치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판 이외에 민주주의의 작동에 필수적인 또 다른 요소는 다수결을 초월한 ‘대의에 대한 합의(consensus on the Cause)’다. 여야가 대립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 대립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여야 대립의 궁극적인 목적이 상대방의 절멸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차라리 독재다(상대방의 절멸을 통해 자신만이 남게 될 것이므로). 민주주의는 우리가 왜 대립하는 것인가, 즉 논쟁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논쟁이 그 목적에 가 닿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하기에 민주주의에는 초당적인 ‘대의’가 필요하다. 이 대의는 다수결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발전’, ‘조국의 발전’과 같은 의제를 다수결에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생활방식’, 즉 문화 역시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민주주의는 일종의 생활방식이다. 다시 말해 생활 구석구석에 민주주의를 느끼고 실천하는 사회적 장(field)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민주주의는 몇 차례 ‘선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민주주의는 굵직굵직한 사건마다 시국 선언을 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무의식적인 생활세계의 방식이 되어야 하고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야 한다. 실상 이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사회 전체의 의식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중우정치에 대한 안전판, 대의에 대한 초당적 합의 그리고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한국의 민주주의, 그것도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에 감염되어 있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살펴보면 우리가 과연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었던 것이 맞는가라는 회의감이 들게 된다. 한국 사회에는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퇴락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판이 없다. 상원/하원의 구분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의 공식에 근거해 모든 국민은 ‘돈벌이’에 몰두하고 있다. 모두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상태에서 국민의 정신 상태를 다루어야 할 인문사회과학은 방구석 한켠으로 밀려나 ‘인문충들의 혼잣말’ 정도로 취급 받고 있다.


초당적인 ‘대의에 대한 합의’ 역시 마찬가지다. 상당한 편폭의 글을 요하는 주제이지만, 한국은 국가적 정당성의 기초가 매우 모호하고 취약한 나라다. 한국은 아직까지 자신의 정확한 건국일이 언제인지에 관해서조차 합의가 되어 있지 않은 나라다. 이렇게 취약한 토대 위에서 여야는 상대방의 절멸을 정치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총선과 대선의 승리를 위한 표 계산에만 열중하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중에게 표를 사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는 극단적인 포퓰리즘적 민주주의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중 매체는 이와 같이 앞뒤를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식 민주주의에 기름을 붓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활방식. 이 생활방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사실상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생활방식의 차원에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비민주주의적인 사회인가는 최근의 상황을 통해서도 곧장 드러나는데, 평등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국 선언조차도 서울 중심적인데다가, 이에 더해 서울의 주요 대학 몇 군데의 시국 선언만 언론을 통해 보도될 뿐이다. 요컨대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를 비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경제 발전에 따른 민주화라는 공식이 얼마나 파국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가에 관해 우리는 처절한 반성을 해봐야 한다. 경제가 발전하면 민주 의식 역시 자동적으로 생성된다는 명제는 그 명제 속에 설정된 ‘민주’라는 개념을 아주 얕은 수준에서 설정했을 때에만 타당하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얄팍하게 설정했을 때에만 그 공식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 왔다. ‘투표하고, 시위하고, 경제가 발전하면 그것으로 민주주의 완성!’ 정도의 수준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주의의 밑천을 마련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하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전면적인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의식적인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 더불어 생활방식이라는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모두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어떻게 민주적인 교양을 갖춘 시민이 등장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돈벌이에 미친 사회는 사업가 - 그것도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인색한 사업가 - 를 낳을 수 있을지언정, 함께 살아가는 덕성을 갖춘 민주 시민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 탄핵을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 모두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다. 한데 앞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밑천’이 갖춰지지 않는 한 판결이 어느 쪽으로 나든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정착할 수 없을 것이다. 한데 정말 한국 사회에는 중우정치의 방지, 초당적 대의, 생활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등 민주주의를 위한 밑천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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