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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봉'과 우리의 일상에 관하여

by gramscist

지난 2001년 개봉했던 영화 <친구>에는 ‘연극이 끝나고 난 후’라는 노래가 삽입되어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연극이 끝나고 난뒤

혼자서 무대위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있죠

관객을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는 떠나버리고 무대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있죠"


가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연극이 끝나고 난 후에는 ‘정적’만이, ‘고독’만이 남는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극장을 가득 채웠던 열기도, 박수도, 함성도 사라지고, 극장은 텅 비게 된다. 이 이야기를 콘서트장으로 옮겨도 그 결과는 매한가지다. 콘서트가 끝나면 열기와 함성, 박수는 모두 사라지고 정적만이, 고독만이 남는다. 관객은 다음 콘서트를 기약하면서 열심히 흔들던 응원봉을 들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12.3 내란 사건 이후 거진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기간 동안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아마도 지난 박근혜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무도한 정권에 맞서 용감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함성을 지르고 권력자는 쓸쓸히 권좌에서 물러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전개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내란 사건 이후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우리가 경험했던 당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이야기는 전개되지 않고 있다.


사실 거리로 시민이 쏟아져 나오고 무도한 권력자가 쓸쓸하게 퇴장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익숙한 장면이다. 4.19가 그랬고, 87년이 그랬고, 2017년이 그랬다. 한국은 최소한 세 차례 - 박정희는 암살 당했으므로 제외한다 - 무도한 권력자를 시민의 힘으로 끌어내렸다. 한데 이 세 차례의 경험과 이번 ‘윤석열 사태’는 뭔가 다르다.


앞선 세 차례의 권력 타도에 있어 최고 권력자는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자신이 벌인 일 혹은 자신의 집정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평가 받는 전두환마저 결국 체포에 응했다. 윤석열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군부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전두환이 또 다시 ‘계엄’을 시도하지 않고 순순이 체포에 응했다는 건 그래도 그 사람이 공권력의 의미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방어적, 소극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한 방어적 소극적 태도를 만들어낸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일말의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윤석열은 다르다. 이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공세적이고도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지지자들에게 호소문을 보내고, 체포에 불응하는 등 우리가 그동안 경험했던 이전의 권력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역대급 권력자’를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앞에 나타난 윤석열이라는 인물은 상황 판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 능력 자체를 결여한 사람이다. 우리는 제도적 차원의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1987년으로부터 약 4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권력 행사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판단을 상실한 최고 권력자와 마주 서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상황을 정말이지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일까? 물론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윤석열이라는 인물에게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몰락하고 국가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 모든 사태의 일차적인 책임은 윤석열이라는 일 개인에게 있다. 하지만 <박근혜와 윤석열은 무엇이 다를까>라는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윤석열이라는 최악의 권력자 - 공권력에 대한 판단/태도에 있어 윤석열은 전두환보다도 열등하다 - 는 한국 사회가 배출한 괴물이자, 한국 사회 어느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병근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결과인지도 모른다.


앞서 나는 ‘연극이 끝나고 난 후’라는 노래의 가사를 적어 보았다. 가사처럼 연극이 끝나고 나면, 관객은 뿔뿔이 흩어져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번 윤석열 내란 사태로 인해 한 달 넘게 진행되고 있는 시위 현장에 응원봉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언론들은 ‘젊은이들이 시위 문화를 바꾸었다’며 마치 새로운 문화 현상이 나타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호들갑은 오히려 응원봉이 대답해야 할 '진짜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시위 문화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이명박 정부 때도, 박근혜 정부 때도 등장했었다. 지난 ‘80년대’와는 다르게 거창한 구호도 비장한 분위기도 없이 마치 ‘축제’와 같은 시위를 만들어냈다며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한층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회자되었다. 한데 이미 오래 전에 ‘레벨 업’을 이룩했다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왜 윤석열이라는 희대의 괴물을 탄생시킨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 말로 응원봉이 자문해 보아야 할 '진짜 문제'다.


‘독재 타도’가 곧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최종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안이하고도 어리석은 일은 없다.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곧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 결과는 또 다른 독재자의 등장이다. 하기에 민주주의는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과 일상 생활을 바꾸는 ‘일상적 차원’의 작업을 수반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과연 무엇을 바꾼 것일까? 우리는 구호를 외치고 응원봉을 흔드는 것 말고 우리의 일상적 삶을 전환시킬 용의가 있기는 한 걸까?


한편에서는 윤석열이라는 독재자를 권력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시위가 진행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의대 열풍이 불고 있다. 의사가 되어 평등한 세상에서 짜릿한 불평등을 누리며 살겠다는 욕망이 자본과 결합해 화려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 교육 체계, 즉 위계적 학벌 구조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더 좋은 대학을 나와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려야 한다는, 합법적인 불평등을 위한 게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고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스펙타클한 장면이 펼쳐질 것 같지만, 거창한 장면에 가려진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시위 현장을 수놓고 있는 응원봉이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한국 사회의 상황은 콘서트 장과 너무도 유사하다. 열정적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난 후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 기존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결코 윤석열 탄핵을 위한 시위와 응원봉 문화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민주주의가 콘서트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일상 생활에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한다. 콘서트 장에서 목청껏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열정적으로 응원봉을 흔들고 나온 뒤 그 경험이 자신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 그것은 그저 쾌감의 ‘소비’에 불과한 것이다. 사실 콘서트는 그래도 된다. 어쩌면 그것이 콘서트의 궁극적 목적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콘서트처럼 한 판의 감정 소비에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그저 아무런 방향성도 가치관도 없는 한 판의 ‘소동’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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