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딸이 내게 물었다: “아빠, 엘리베이터가 한국말로 뭐야?”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응, 승강기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뭔지 알 수 없는 궁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과연 승강기라는 말도 정말 한국말일까?’라는 물음이 머리속에서 곧이어 뒤따라 나왔기 때문이다. 평소 한자와 밀접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직업 특성상 ‘승강기’라는 단어는 곧 한자 ‘昇降機(오르고(昇) 내리는(降) 기계(機))’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엘리베이터’라는 개념을 한국어로 ‘승강기’라고 하는 것은 역시 뭔가 석연치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러던 차에 주변을 돌아 보니 ‘K-컬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워낙 익숙하게 들어왔던 터라, 나 자신도 별생각 없이 쓰고 있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K-컬처’라는 단어는 정말이지 기괴한 말이었다. 익히 알고 있듯 ‘K-컬처’는 ‘한국 문화(Korean Culture)’를 가리킨다. ‘한류’ 열풍 이래로 한국의 대중 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앞에 ‘K’라는 단어를 붙인 ‘K 드라마’, ‘K 팝’과 같은 단어들이 널리 회자되었고, 이제 그러한 한국 문화를 아울러 ‘K-컬처’라고 통칭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단어를 가만히 뜯어보면 우리의 언어 생활이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민족 문화를 얼마나 기괴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K-컬처’라는 말은 ‘한국’을 뜻하는 ‘Korea’와 ‘문화’를 뜻하는 ‘컬처’를 조합한 말이다. 한데 이 조합 자체가 굉장히 이상하다. K-컬처’라는 표기에는 언어적 일관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왜 한국을 가리키는 단어에 영어 알파벳 ‘K’를 쓰는 것일까? 그리고 왜 ‘컬처’라는 단어를 그대로 음차해 갖다 붙인 것일까? 그리고 이와 같은 언어 습관에는 과연 어떠한 세계관 혹은 태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앞서 ‘알파벳’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데 이 ‘알파벳’이라는 단어는 ‘alphabet’라는 영어 단어를 그대로 음차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승강기’ 역시 사실은 모두 영어 혹은 한자를 그대로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언어 습관은 무언가 새로운 개념이 도입될 때, 그 본래의 뜻을 깊이 있게 파악해 그것을 자신의 말과 개념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그 발음만 직수입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수입된 개념의 의미를 자기화하기보다는 그 표면적인 발음을 별다른 고민없이 가져다 쓰면서 마치 자신이 그 뜻을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음차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언어적 불성실함에 비추어 보면 ‘K-컬처’라는 표현의 불성실함은 괘씸하다못해 가련하기까지 하다. ‘K-컬처’는 이미 한국어에 존재하고 있는, 다시 말해 이미 충분히 한국화된 ‘민족 문화’ 혹은 ‘한국 문화’와 같은 기존의 개념/단어로도 충분히 표현 가능했다. 그럼에도 왜 굳이 ‘K-컬처’라는 정체 불명의 단어를 만들어서 쓰는 것일까? ‘K-컬처’라는 단어의 밑바닥 심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 문화를 외국 사람들이 사랑해주니, 그들에게 맞춰 영어식 표현으로 표기해주는 것이다.” 참 친절한 민족이다. 자기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자기말을 버려가면서까지 ‘외국인’의 입맛에 맞게 발음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과연 ‘이미 한국적인 것을 포기한 한국 문화’를 외국인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만약 한국적인 것을 포기한 한국 문화라면 우리는 그것을 왜 우리 문화라며 자부심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 ‘K-컬처’의 민낯과 그 공허함이 배어나오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 혹은 ‘민족주의’는 이미 ‘낡은 것’, ‘철지난 것’이 되어 버렸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힘을 자랑했던 ‘민족’과 ‘민족주의’는 이제 인터넷과 같이 극도로 익명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공간에서 ‘국뽕’이라는 표현으로 유통되는 배설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관을 다루는 인문학을 ‘인문충들의 꿍얼거림’ 정도로 처박아 버린 쿨한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민족주의 개념을 심각하게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폐적 덕질’과 같은 것이 되어 버렸지만, ‘K-컬처’라는 단어의 기괴함과 공허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폐적 덕질을 한 번 해볼 필요도 있을 듯 싶다.
근대 민족 국가 체제에서 민족과 민족주의는 일종의 시민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한다. 자본주의가 심화되고 차가운 얼굴을 한 국가라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전통 사회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공동체적 가치와 유대 관계가 해체된다. 근대 민족 국가가 수립되기 이전, 전통 사회는 시간적 계승, 즉 세대와 세대가 연결되는 문화적 유대감에 의해 사회를 유지했다. '근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이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전통 사회가 해체되자 '현대인'은 가치관을 상실하게 되고 극심한 고립감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모종의 연대감과 일체감이 필요했고 이에 민족과 민족주의는 전통 사회가 담당했던 유대감과 일체감의 회복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결국 민족/민족주의는 특정 공동체의 가치관을 생산, 계승하고 사회가 연대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시민 종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과 민족주의가 애초부터 그러한 역할을 포기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때 민족과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신념 체계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족/민족주의는 왜 그리고 언제부터 ‘K-컬처’, ‘국뽕’과 같은 기괴하면서도 자폐적인 성격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일까? 한국의 민족/민족주의가 오늘날과 같이 기형적이면서도 자폐적인 모습이 된 데에는 자본의 역할이 가장 컸다. 2000년대 이후 한국의 자생적 대중 문화 - 이 역시 그렇게 건강한 상태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 가 해외시장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바로 ‘한류’의 시작이다.
한류가 시작되면서 한국의 대중 문화는 훌륭한 ‘수출 상품’이 되었다. 수출 상품이 되었다는 것은 ‘여기 한국’보다는 ‘저기 외국’에 내다 팔아야 할 상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류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한국 대중 문화의 타자 지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인지도를 얻은 후 일본/미국으로 ‘진출’하는 것이 ‘국위선양’으로 칭송 받고 있는 문화적 풍토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류는 이와 같은 한국 대중 문화의 타자 지향성에 기름을 부었다. ‘한국인은 외계인을 만나도 먼저 ‘두 유 노우 코리아’라고 물어 볼 것’이라는 농담이 회자될 정도로,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던 한국인에게 한류의 성공은 그야말로 인정 욕구의 한을 풀어준 계기가 되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드라마 ‘대장금’까지만해도 무언가 ‘한국적인 것’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후 돈에 맛을 들인 ‘K-컬처’는 한국적인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발굴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한국적 감각, 특히 한국 사회가 혹독한 산업화를 겪으면서 체득하게 된 ‘병태적 감각'을 상품화하는 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막장 드라마’와 K-팝이 그것이다. 실상 우리가 ‘우리 문화’라고 자랑하는 K-드라마와 K-팝에는 한국적인 ‘감각’이 들어 있을지언정, 한국적인 ‘가치’는 내포되어 있지 않다. 앞서 언급한 대로, 만약 민족/민족주의의 역할이 모종의 가치관을 계승해 공동체의 연대감을 만들어주는 것이라면 K-드라마와 K-팝이 모종의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그러한 가치관을 통해 사회적 연대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자랑해마지 않는 ‘K-컬처’는 실상 소비하고 버리는 ‘상품’이다. 그것은 ‘돈’ 이외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기에 ‘K-컬처’는 ‘문화-상품’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공동체의 가치관과 유대감을 만들어내는 ‘민족-문화’는 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K-컬처’라는 기괴한 개념의 공허함이다.
한국어는 사라져 가고 있다. ‘충고’ 대신 ‘어드바이스’, ‘돌봄’ 대신 ‘케어’, ‘시장’ 대신 ‘마트’, ‘협업’ 대신 ‘콜라보’, ‘주문’ 대신 ‘오더’. 이 외에도 한자어를 영어가 대체하는 현상은 전방위적으로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영어에 의한 한자어의 치환 현상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차피 일본과 중국에서 생성된 개념을 직수입해 발음만 표기해서 쓰던 민족이 아니었던가? 다만 ‘오늘날의 한국인’이 ‘예전의 한국인’과 다른 이유는 ‘예전의 한국인’은 최소한 이러한 언어 습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라도 했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는 존재가 거주하는 집인 것이며, 언어야 말로 존재를 증명하는 궁극적 토대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은 얼기설기 덧이은 판자집에 살고 있다. ‘K’와 ‘컬처’가 마구잡이로 덧붙여 있고, ‘오더’, ‘어드바이스’, ‘케어’ 같은 개념이 소개되면, 별다른 생각 없이 오랜 시간 사용해온 단어를 폐기하고 아무런 맥락 없이 영어 개념을 음차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예컨대 정작 미국에서는 텐션(tension)이라는 말을 ‘흥’/‘기분’이라는 맥락에서 사용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흔히 ‘텐션 좋다’, ‘텐션 끌어 올려’라는 말을 하지만 정작 미국에서 ‘tension’이라는 단어는 ‘긴장’, ‘예민함’과 같이 다소 좋지 않은 어감으로 사용된다. 왜 한국인이 ‘텐션’이라는 단어를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일본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이야기처럼 엉터리로 지은 집은 늑대의 입바람에 날아가 버린다. 마찬가지로 ‘K-컬처’로 쌓아 올린 한국어와 한국이라는 집은 ‘시나브로’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