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국종 교수의 발언이 화제다. 이국종 교수는 한 강연회에서 중증외상분야의 열악한 근무 조건과 환경을 질타하면서 자신의 인생은 망했고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탈조선’하라고 후배 의사들에게 조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이 나라는 입만 산 문과놈들이 해먹는 나라’라는 격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 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발언을 사과했다고 한다. 다소 격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도한 말이 튀어나왔다는 것을 자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이 교수의 발언에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는 변하지 않는,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변할 의지가 없는 한국 사회와 지도층에 대한 답답함을 절망 섞인 어조로 토로한 것이고, 그 말의 강도만큼 그의 진성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교수가 여전히 ‘문과/이과’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엉뚱한 진단, 즉 ‘문과가 다 해먹어 나라가 망했다’라는 진단을 내놓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사회는 정말 ‘문과가 다 해 먹어서’ 망한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찐문과’ 성향이자 결국 그 성향을 버리지 못해 ‘문과업’에 종사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과놈들이 다 해 먹는’이라는 말은 기괴하다 못해 차라리 절망적이었다. 이 교수는 아마도 자신이 만나는 최고위층 관료들이 대다수 문과 출신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고위 관료의 절대 다수를 문과 출신이 차지하고 있다는 건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이 교수가 깊게 보지 못한 건 그 관료들이 문과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그것도 문과의 ‘문’ 근처에도 가지 못한 기술자에 가까운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관료는 사실상 기술자다. 관료는 주권의 집행기구인 국가라는 권력 기관을 움직이는 부품이며, 막스 베버가 언급한대로, 영혼이 없는, 행정 명령을 수행하는 엔지니어에 가깝다. 하기에 이들은 행정 체계에 갇혀 있고 기존 권력 관계에 순응적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진 주권자가 엔지니어에 가까운 관료를 부릴 것인가의 문제다. 주권자가 멍청하면 관료도 멍청하게 움직이고, 주권자가 현명하면 관료도 현명하게 움직인다. 관료는 주체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며, 설사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최고 권력자의 명령 범위 안에서 사유한다. 그렇다면 관건은 결국 어떠한 가치관을 가진 권력자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될 것인데, 여기서 ‘문과가 다 해 먹는다’는 사고 방식의 패착이 드러나게 된다.
이국종 교수의 말대로 한국의 의료 체계, 특히 중증외상분야의 근무 조건은 열악하다. 한데 이 교수는 ‘중증외상분야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혹은 ‘중증외상분야는 왜 중요한가’라는 가치 판단의 문제로부터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가 실감나게 보여주었듯, 중증외상분야는 생명을 구하는 최일선에 서 있다. 하지만 ‘중증외상분야가 생명을 구하는 최일선에 있기에 중요하고 그것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라는 판단은 결국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문과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생명의 소중함은 의학 기술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특히 ‘돈’보다) 중요하다는 ‘비기술적 가치 판단(즉 문과적 판단)’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기술적 판단이 주권자, 즉 최고 권력자에게 수용되어야 비로소 기술자인 관료들이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 역시 ‘문과’와 ‘이과’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했던 한국 교육의 피해자이기에 이국종 교수는 중증외상분야를 비롯한 한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문과 전체로 돌리는 그야말로 황당한 우를 범하고 말았다.
이게 다 문충들 때문이야!
이 참에 우리는 ‘문과 출신’이라는 시대 부적응자이자 문제아들에 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국종 교수도 옛날 사람이라 최근의 추세를 모르는 것 같다. 사실 이제 한국은 이국종 교수의 바람대로 문과 출신들이 ‘찍소리도 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문과=루저’라는 공식이 정착되었고, ‘문과 나오면 굶어죽는다’는 말이 회자되는 것을 넘어, ‘문충(문과출신과 곤충을 결합한 말)’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방송에서는 노골적으로 ‘문과라서 잘 몰라’, ‘쟤 문과출신이라 저래’라는 경멸 섞인 말들이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병태적 트렌드가 자리 잡는 데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와 주류 언론이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언제부턴가 ‘문과 취업율 낮아’, ‘기업들 문과 출신보다 이과 출신 선호’ 등 문과 전공을 특히 ‘취업’이나 ‘기업’의 입장에서 매도, 무시하는 기사들이 연이어 신문과 인터넷 매체에 등장했다. 이러한 담론 환경 속에서 ‘문과’ 혹은 ‘문과 출신’은 점점 사회 부적응자이자 이과를 가지 못해 문과로 간 실패자들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국종 교수가 자주 만나는 ‘문과 출신 고위 관료’들과는 다르게, 요즘 문과 출신들은 주눅 들어 있고 의기소침해 있다. 그렇다면 이 교수의 바람대로 문과 출신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 찍은 한국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야말로 역설적으로 문과 출신들이 루저로 낙인 찍혀 구석으로 밀려난 결과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이국종 교수 본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었는데, 그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 중요한 가치이고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에 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교수 자신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중증외상분야가 ‘돈’이라는 가치로 난도질되는 근본적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며, 하기에 자본의 폭주를 멈추고 사람의 생명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문과적 지식이 생산하는 것이지 이과적 지식이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게 다 문충들 때문이다’라는 인식이 통용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 돈과 기술 이외의 가치는 설 자리를 잃었고, 그 결과 한국은 차가운 기계와 냉혹한 자본의 논리로 가득 찬 공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국종 교수 개인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역시 문과와 이과를 과도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한국 교육 -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일제 식민 교육 - 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기에 이국종 교수의 발언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국종 교수의 발언을 ‘한국 교육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라고 판단하는 것 역시 문과적 발상인 것을….
‘문충 박멸!’이 국가적 과제가 된 한국에는 그 바람 그대로 ‘사람’은 없고 ‘돈’과 ‘기술’만이 남게 될 것이다. 2050년쯤 되면 ‘위대한 문충 박멸 국가 한국’에는 문충은 커녕 그 역시 ‘사람’인 ‘의느님’과 ‘엔지니어님’마저 씨가 마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