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모든 문제가 대학 문제, 좀 더 정확히 말해 '학벌'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라는 질문은 한국인의 인생 전체를 관통한다. 사회적 지위에서부터 사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어느 대학 출신인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서류상의 한 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위치와 질을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당 부분' 결정짓는 '핵심 질문'이다.
이처럼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라는 질문이 전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대학 서열, 학벌 주의가 사회적 통합을 가로 막고, 지역 차별을 재생산하며, 나아가 출산율까지 떨어뜨리는, 그야말로 '망국병'의 핵심임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 서열 및 학벌주의가 만들어내는 망국적인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논의되고 있는 것이 '서울대 10개 만들기'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본래 책으로 출판되었고, 제목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꽤 많이 팔렸고, 많은 사람이 읽었다. 그리고 이제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모양새다. 하지만 한국의 서열주의, 학벌주의를 해결한다는 취지로 제시된 이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구상은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는 수박 겉핥기식 처방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한국인은 표상에 집착하는 민족이다.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지만, 한국인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 생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인은 '한글'을 사용한다. 한데 이 한글은 뜻을 새기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다. 소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표기할 수 있는 우수한 '문자'이지만, 그것이 표기하고 있는 대상의 본래 뜻(한자, 그리고 영어도 마찬가지)을 가려버기에, 한글을 쓰면 표상만 남고 뜻은 가려져 버린다.
예컨대 '개념'의 한자는 '概念'인바, 그 본래 뜻은 '念', 즉 ‘생각’을 개략적으로(概) 표현한 것, 혹은 총괄한 것이 '개념'의 본래 뜻이다. 하지만 한글을 쓰면 이러한 뜻이 모두 은폐되고 만다.이러한 언어 습관 탓에 한국인은 '제목'에 집착한다. 그리고 '제목'만 바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역시 마찬가지다. 주요 대학 이름을 '서울대'로 바꾸고, 서울대에 투여되었던만큼의 돈을 여타 대학에도 쏟아 부으면 대학 서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처방이 수박 겉핥기에 불과한, 표상에만 집착하고 있는 구상이라는 점을 간파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학벌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좀 더 깊게 그리고 정밀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학벌주의는 '학부중심주의', '서울중심주의' 그리고 '학벌의 신분화/파벌화'가 결합되어 작동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요소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학부중심주의'와 '출신대학의 신분화/파벌화'다. '서울중심주의'는 나머지 두 가지 요소에 비해 오히려 그 비중이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뒤에서 서울대가 10개 만들어지면 생겨날 일을 이야기하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선 '학부중심주의'다. 한국에서 '출신 대학'이 중요한 이유는 '학부'만을 근거로 삼아 그 사람의 '수준'을 판정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학부'를 나오지 않은 사람은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를 받아도 그 구성원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은 연대와 고대도 마찬가지다. 한데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다음과 같은 전제를 깔고 있다: '특정 시점에 측정된 인간의 능력이 평생 동안 지속된다.'
한국인은 어느 특정 시점, 즉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는 어느 특정 시점에, 또는 재수 삼수... 나아가 N수를 마친 어느 시점에 수능을 보거나 수시 모집에 응한다. 그리고 그 시점에 결정된 대학 수준으로 등급이 매겨진다. '학부중심주의'는 바로 이렇게 특정한 시점에 측정된 수준이 평생 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 어떤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수능이 됐든 그 무엇이 됐든 그리고 몇 수를 했든, 고등학교에서 대학으로 넘어 오는 그 '순간' 혹은 '시점'에 결정된 수준이 평생의 등급을 결정짓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왜 생겨났고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한국 문화 저변에 깔려 있는 '파벌화/신분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화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숨쉬듯 자연스럽게 스며든 문화적 사고 방식은 쉽사리 뒤바뀌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한반도에 500년 동안 존재했던 조선이라는 나라는 '파벌'과 '신분'으로 지탱되었던 나라다. '반상의 구분' 그리고 '양반 계층의 파벌 싸움'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한국 사회는 조선 왕조 500년 간 유지되었던 이와 같은 문화적 무의식을 해결, 해체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일까?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한국 사회는 그와 같은 문화적 무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몇몇 소수 의견이 줄곧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학벌주의가 만들어낸 '파벌주의'와 '신분주의'에 적극 가담하거나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편승했다(여러 '진보 인사'가 보여주었던 겉으로는 학벌주의에 반대하지만 '내 자식만은 예외'라는 태도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때문에 한국에서 출신 대학의 등급은 곧 신분이 된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은 신분이 높고, 나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신분이 낮다. 그리고 함께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끼리 무리를 지어, 그렇지 못한 사람을 배제시킨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혈연에 기반한 신분과 출신 지역이 그러한 매커니즘을 만들어냈다면, 조선을 계승(사실 한국이 조선을 계승한 나라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다)한 한국 사회는 '공정하다고 상상된(수능이 절대적으로 공정한 시험이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폭로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이렇게 폭로되고 있는 대학 입학 과정의 불공정성에 대해 쉬쉬하고 있다)' 대학 입학 시험(그것이 수능이 됐든 수시가 됐든)이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신분화와 파벌화라는 조선의 문화를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다.
정리해 보면 '파벌화'와 '신분화'라는 뿌리 깊은 문화적 무의식과 '학부중심주의'라는 한탕주의가 결합되어 만들어낸 것이 한국 학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한국 대학을 떠받치는 학벌주의/서열주의는 제도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즉 의식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만약 이러한 문화적 무의식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대가 10개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앞서 말한대로 '서울중심주의'는 '학부중심주의'와 '출신대학의 파벌화/신분화'에 비해 그 비중이 떨어지는데, 전국에 서울대가 10개 생기면 그로 인해 서울중심주의는 어느 정도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강원도에도, 경상도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서울대'가 있어 굳이 서울에 가지 않아도 서울대에 갈 수 있으니 많은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지역에 머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과거는 오래 지속된다. '학부중심주의'와 '파벌화/신분화'라는 문화적 무의식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한국인들은 아마도 '오리지널 서울대'와 '그렇지 않은 서울대'를 구분하려 들 것이다. 졸업장에 '서울대'가 찍혀 있어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성적표에 드러나 있는 수업명과 교수를 검색하는 등) '오리지널 서울대'와 '그렇지 않은 서울대'를 구분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오리지널 서울대 출신'과 '그렇지 않은 서울대 출신' 사이의 알력다툼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나아가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결국 'SKY'라는 파벌로 돌아가던 한국 사회에 '10개의 서울대'가 만들어낸 10개 파벌 혹은 12개 파벌('서울대' 10개 더하기 연고대 파벌 두 개) 간의 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
'학벌중심주의'와 '출신대학의 파벌화/신분화'라는 문화적 무의식이 분쇄되지 않는다면, 서울대를 10개 만들든, 20개를 만들든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컨대 '학벌중심주의'와 '출신대학의 파벌화/신분화'라는 더욱 강력하면서도 강고한 문화적 무의식이 해체되지 않는 한,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는 '서울중심주의'를 해체시키는 데에만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을 뿐 더욱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제도는 문화보다 약하다.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는 그 제도의 헛점을 파고 든다. '학부중심주의'와 '출신대학의 신분화/파벌화'라는 문화 의식이 해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병근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 문제를 좀 먹어들어가 더욱 끔찍한 괴물을 만들어낼 것이다.